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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7월31일 토요일 8 (제175호) 기 획 밀성박씨 나동문중은 신라왕성으로 경명왕의 장자 밀성대 군 휘 언침을 관조로 하고 전(傳)하여 고려 충선왕조의 내부 시승(內部侍丞)으로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에 녹훈되고 추은(推恩)으로 가상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 祿大夫), 시호를 충헌(忠憲)으로 추증 받은 휘 척(陟)은 파조 이고,현손(玄孫)휘대양(大陽)은과거에올라진현관대제학 (進賢館大提學)으로 삼중대광전법판서(三重大匡典法判書) 로 익조공신(翊祚功臣)으로 밀천군(密川君)으로 봉작(封爵) 되니즉비조(鼻祖)이다. 비조(鼻祖) 대제학공은 아들 응(膺)·일(鎰) 형제를 두었는 데 장남 휘 응(膺)은 태종4년(영락1)사마시에 합격하여 사환 (仕宦)의길을들어중훈대부판사재감사를지내고아들겸형 (謙亨)은 용기시위사 좌령, 사직 창신교위를 지냈다. 그의 아 들 시림(時霖)은 청렴하고 강직하였으며, 어모장군 행 용양 위부사직을지냈고,사직공시림의아들연(演)은성종3년(壬 辰) 식년시 진사에 3등으로 입격 성균진사이고, 고성 입향조 완천당의아버지가된다. 생원진사 양시에 오른 휘 덕손(德孫)의 호는 완천당(完川 堂)으로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기 묘사화의 화를 피해 노모와 동생(휘 덕수)를 데리고 지금의 고성군구만면주평리에은거하다장남인실(仁實)과아우휘 덕수(德秀)를 고성에 남겨두고 덕수의 아들 거실(居實)을 데 리고 함안으로 우거를 옮겨 안관을 비롯한 명현석학들과 교 유하며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보덕 안중손(輔德 安仲 孫),과 더불어 영남삼손(嶺南三孫)이라 세인들은 칭송하였 다. 완천당공의 아들 휘 인실의 호는 금헌(琴軒)으로 명종 병오 (1546년) 진사시에 올랐고, 아들 화(樗)를 화는 광립(光立)· 대립(大立)·치립(致立) 삼형제를 두었고, 장자 광립의 아들 두문(斗文)의 호는 청천(聽川)으로 효종8년(1657, 丁酉)에 문과에급제하여찰방을지냈다. 청천공은 슬하에 종(綜)·위(緯)·순(純)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종(綜)은 태동(泰東)·규동(奎東)형제를 두었고, 장남 태동은 경(璟)·훈(壎)·근(瑾)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경 (璟) 차남 훈(壎)의 후손들은 고성군 구만면 주천리에 남았 고, 삼남 근(瑾)은 풍광이 수려한 나동에 세거지를 옮겨 지금 의나동입향조이다. 완천당공의 후예는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모두가 학덕을 겸 비하였으나 벼슬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오직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매진하면서 고성의 토호세족으로 그 명성을이어갔다. 나동 입향조 휘 근(瑾)은 아들 제응(齊應)·제수(齊守)·제 주(齊周)삼형제를두면서크게번성하면서장파(長派),중파 (仲派),계파(季派)로분파를이룬다. 장파(長派) 제응(齊應)은 아들 장길(長吉)·장익(長益)·장 년(長年)·장윤(長潤) 4형제를 두었는데 셋째 장년(長年)은 아들효남(孝南)에이르러无后이고,넷째장윤(長潤)은수직 으로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중파(仲派) 제수(齊守)는 수직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그의 아들 장운(長雲)의 호는 취강(翠岡)으로 효행과 학행이 뛰어나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아들 효근(孝根), 효유(孝 裕)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효근(孝根)의 호(號)는 경송(景 松)으로 효행이 남다르다.어버이 섬김을 지극한 효도로 하여 성효의 감동으로 산신이 약을 주니, 모친이 죽었다가 다시 났 다. 고종 을유(1885년)에 동몽교관 조봉대부의 증직과 정려 (旌閭)가내려졌으며,아랫마을청광리로이주했다. 경송공의 장자 한회(瀚會)의 호는 국포(菊圃),고종19년 임 오(壬午, 1882) 즉 회갑이 되는 해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에 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해 6월에 군란(軍亂)이 일어나 서울 이 소란하여 심히 위태로워 공포의 분위기였다. 친구인 재상 이 시험 삼아 같이 치란(治亂)의 대책을 논의하였는데 그의 변화에 응하고 어지러움을 극복하는 도량에 깊이 감복했다. 일이 안정된 후에 표를 올려 밝히고자 하였으나 공이 고사하 며 말 하 기 를 “이 제 늙 었 다 . 또 한 먼 땅 에 서 미 세 한 발 자 취 로 나라 학교에 올랐으니 분수에 충분하다. 이렇게 쇠약하고 썩 은 몸으로 다시 벼슬길을 달리랴?”라고 말하고는 곧 고향으 로돌아왔다. 차남 영회(瑛會)의 자(字)는 익첨(益瞻) 호는 죽포(竹圃), 효자 박효근의 아들이다. 순조 정해년(1827)에 태어났다. 문 학으로 명망이 무거웠고, 효우가 매우 두터웠다. 어버이 병에 약을구하려가는길에눈속에백화사(百花蛇)를 얻어약으로 쓰자 신기한 효험의 응답이 있었다. 고종 임진(1892년)에 동 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들 승철(承喆)의 호는 수옹(壽翁)으로 통훈대부 건릉참봉이고, 셋째 승은(承垠)은 천품이 근엄하고 삼강(三綱)과 오상(五 常)을 실천하며 모범을 보이고 또 향후 반세기에 퇴색되어질 것을 예지하고 염려한 가운데 탄생한 여성계인 ‘삼오계(三五 契)창립에주도적역할을했다. 진사 국포공(휘 한회)의 아들 승팔(承八)또한 효행이 깊어 삼강록에 전해지고 그의 아들 돈병(敦秉)의 자(字)는 덕응 (德應), 호는 청강(晴崗)이다. 23세가 되는 을유(乙酉, 1885 년)에성균진사시에합격했다. 이미 귀향하여서는 조부모와 모친을 봉양하여 모시는 것을 당연한 직분으로 삼아 다시는 나가서 벼슬하는 것으로 일삼 지 아니했다.더욱 스스로 옛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 널리 선비 벗들을 모아 문학과 역사 다스림을 강구하여 충분히 쓸 수가 있기를기대하였다. 동 배 들 가 운 데 가 난 하 여 취 학 을 못 하 는 자 및 집 안 무 리 가 운데 궁핍하여 자급이 불가능한 자에게는 한결 모두 밑천을 대주어구휼했다. 완천당(고성 입향조)공의 묘소가 함안에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져 묘소를 실전하게 되었다. 인근의 종족들에게 묻고 꾀 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사를 올 렸다.이또한의리를말미암아일으킨일이다. 슬하에 아들 3남 1녀를 두었는데 용하(容夏)·용만(容萬)· 용보(容甫)인데 장자 용하(容夏)는 민족학숙인 보성전문 3회 법학부 5회, 상업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나 일제 치하에서 관직생활을 싫어하여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추사 김정희 의제자였던성파하동주와추사체연구로교유했다. 차남 용만(容萬)은 면장이고,셋째 용보(容甫)는 ㈜유성 등 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청도의 화산재에 대재학공 단비를 세웠다. 오릉보존회 총본부 이사장, 밀성박씨대종회 장을 역임하였으며, 밀성재 건립당시 거액을 출연하였으며, 고향발전에도크게기여하는등종중사에큰족적을남겼다. 취강공(휘 장운)의 차남 효유(孝裕)의 호는 농암(農菴)으 로 타고난 효자이다. 형제간에 우애가 뛰어났으며, 백형 효근 (孝根)과 함께 부모상에 시묘를 하는 등 형제병효(兄弟倂孝) 라 칭송했다.고종 병자(1876)절충장군 행 용양위부호군,188 2년 수직(80세)으로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1888년 효행이 드 러나 임금이 가상히 여겨 특진하여 통정대부 돈영부도정에 이르고부인김씨는숙부인에봉해졌다. 아들 동회(同會), 수회(守會), 두회(斗會), 현회(顯會), 달 회(達會) 오형제를 두었는데 두회(斗會)의 증손 용덕(容德) 의호는성암(省菴)으로뛰어난효성과애종으로 종중의문화 를새롭게썼다.우선농암공이하선조의묘소를한데모아가 족묘원을 만드는데 공헌하였으며, 아버지 휘 문병(文秉) 공 이하가족묘원성암공원을조성하였다.특히고향나동마을에 강한 애향심으로 회관 건립시 부지와 거액의 성금을 기탁하 였으며, 충헌공의 경모재, 대제학공의 화산재, 완천당공의 성 암재, 입향조 휘 근의 영모재 등 위선사업에 매진하여 지역은 물론박성(朴姓)의많은단체에서회자되고있다. 농암공의 사남 현회(顯會)의 호는 경암(景菴),학행으로 사 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이밖에도 많은 후손들이 마을과 문중 을 위해 헌신하였음이 마을 곳곳에 공적비 등이 세워져 이를 뒷받침해주고있다. 나동마을에 박성(朴姓)이 정착한 이후 후손들은 높은 도덕 정신과 책임의식을 갖고 선도적 역할을 이어왔다. 1936년 발 기하여 1940년 창계 한 국내 최초의 여성계인 삼오계(三五 禽) 는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실천하며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향후 퇴색해 질 것을 염려하여 만들어져마을의정신적인역할을해냈다. 그리고 산촌마을의 특성을 부각시킨 애림계(1960), 조손 (祖孫)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부자(父子)가 양대에 걸쳐 효자 정려를 받음으로서 대를 이은 효자 가문으로 이름 을빛내면서자연스럽게순화(純化)되어갔다. 특히 호롱불로 길쌈하던 오지 산촌마을에 전기를 가설하여 밤을 밝게 하여준 심계 박용보,회관 신축에 부지와 거액을 헌 성한 성암 박용덕 회장은 마을의 일대 변화와 혁신 그리고 자 라나는청소년들에게큰영향을끼쳤다할것이다. 기묘사화(1519) 이후 완천당공(휘 덕손)의 아들 인실(仁 實)의 후손이 중심이 된 ‘맹중계’의 헌신적인 역할은 마을을 탈바꿈시키며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하나라도 많으면 해보자’라는 표어로 시작하여 오늘의 탈바꿈된 모습 즉 여러 종류의 시범마을로선정된후 비로소 고성군 제1호의 체험·휴 양 마을로 지정된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일컬을 정도가 되었다. 나동은 20세기 초에는 무려 13성 60여 세대가 거주하고 그 중 우리 박성(朴姓)은 29세대가 집성촌 모습으로 살고 있었 다. 그런데 노일전쟁(1905~1905) 이후 가까운 청광으로 멀리 는 전라도 지방으로 다수가 출향, 20세기 말엽까지 지내오면 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보람 있는 모습을 보인 후손들이많았다.이에고향나동에본적을둔입향조의7대손 (容 자 항열) 이하의 출향인 중 행정·경제·교육·의료 및 문화 예술·종교 등의 분야에서 고향의 이름을 빛낸 이들을 소개해 본다. [ 행정 ]박돈병 진사의 차자 용만(容萬)은 일제 강점기 개천 면장, 그의 아들 기원(基遠)은 농촌진흥청 과장으로 녹조근 정훈장 2회 수상, 효자 죽은공(휘 영회)의 아들 승용의 손자 용해(容海)는 경찰서장, 승은(承垠)의 손자 용계(容啓)는 광 복 후 대한민국 초대 민선 개천면장, 은병(銀秉)의 아들 용지 (容址)는 교통부 과장, 증손 청원(淸遠)은 행정고시 제27회 합격 후 상공부 행정사무관을 시작으로 산업통상자원부 기획 조정실장, 정책실장을 역임하고 전자부품연구원장, 공학박사 건국대학교특임교수를지내고홍조근정훈장을받았다. [ 경제 ]박돈병 진사의 장자 용하(容夏)는 완천당공 이하 양 대선조제전(祭田,위토답)7두락을헌납하고이후필요경비 를 계속 자담하였으며, 둘째 아들 용만의 여섯 째 아들 길원 (吉遠)은은행지점장,진흥철강(주)사장,그의아들상영(商 英)은 ㈜ 조흥섬유 대표이사, 차남 상도(商道)는 ㈜고려개발 전무이사로 산업포장 수상, 박진사의 셋째아들 용보는 ㈜ 유 성산업을 창업하여 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밀양 밀성재와 경 모재, 청도 화산재 등 문중사 필요경비를 자담하였으며, 고향 마을 전력화 및 농로사업에 자담했다. 효자 죽은공(휘 영회) 의 차남 승규의 장손 용탁(容鐸)은 산업은행 지점장, 심계공 (휘 용보)의 아들 임원(任遠)은 ㈜유성 회장, 모천공(휘 승 은)의 아들 종병(鍾秉)은 마산지구원예협동조합 창설 회장, 그의아들용희(容熙)는부국증권(주)대표이사,철종조에효 행으로 이름을 떨친 송당(松堂, 휘 승령)공의 손자 성암공 용 덕(省菴 容德)은 공직에 몸담아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명퇴 후 ㈜대덕산업을 비롯 3개 회사를 설립 대표이사를 역임하였 으며, 고향마을 전력화 사업, 농로 개설에 거액을 헌성하고, 회관건립시부지와기금을기부했다. 용문(容武, 휘 승은 后)는 ㈜대한항공 지점장), 보원(普遠) 은㈜라미노대표이사지원(智遠)은유니온건축사대표,상범 (商範)은㈜유성대표이사이다. [ 교육 ] 송성공 휘 용숙(容淑)은 성균관 알성과장 시험관, 용관(容寬)은 중등교장(국민훈장 동백장), 용빈(容彬)은 초 등교장(국민훈장 동백장),용숙(容淑)은 부산대학교 교수(사 범대학장, 문학박사)와 부산시 문화재위원으로 국민훈장모 란장수훈,용헌(容憲)은서울대교수(철학박사,사범대원장) 국민훈장모란장수훈,진원(進遠)은부산대학교교수(문학박 사, 영문학), 재원(在遠)은 미국 오리건주립대학교수(식품공 학박사), 홍원(鴻遠)은 부산대학교 교수(부총장, 철학박사), 상준(商準)은 동국대 교수(경영학박사), 민원(敏遠)은 창원 대학교교수(공학박사),경남스마트산업단장이다. [ 의료] 규원(奎遠)은 수의사, 대원(大遠)은 약국경영(진 주) 국민포장 수상, 영원(瑩遠)은 미국 재활병원장, 승원(勝 遠)은 소아과병원장, 호원(好遠)은 치의과 의원장(강릉대 교 수),주원(周遠)은치의과원장,상철(商哲)은한의원장이다. [ 문예·종교]풍천공 용두(容枓)는 기독교 장로로 수어통역 인이며 한국 최초의 농아인교회 설립에 봉사, 톱 연주가로 국 내외 공연 45년간 1천회, 국방대학원 군무관, 서울시 공립고 등학교 교사로 국내 매스컴에 30여회 소개되었다.집원(執遠) 은 청각장애인으로 한국 기독교 감리회 최초의 전도사, 한국 농아인체육회·산악회 및 협회조직, 리틀야구단 조직 한·일전 개최(3회), 세계장애인올림픽대회 한국대표위원으로 참석, 한국 최초 농아인교회(서울농아교회) 건축, 용조(容祚)는 전 주 서현교회 목사이다. 그는 특히 조부가 노일전생 후 전라도 이리로 출향한 후 그 후손들이 나동과 절연된 상태였는데 부 친 휘 창승의 유언에 따라 고향 나동 증조부 휘 합회의 묘소를 출향 90년 만에 참배함으로서 그 후손들이 ‘정축보’에 비로소 등재하는역할을하였다. 이와 같이 나동마을의 후예들은 각처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보이고 있다. 특히 후손들은 선조의 유훈을 받들고 행적을 더 듬는 선조유적탐방을 실시하는 등 숭조심 또한 돋보여 나동 마을의장래는더욱밝아보인다. 뱚집성촌 탐방 경남고성군개천면나동(羅洞)마 을 밀성박씨충헌공파대제학공후완천당공후예400여집성촌 경남고성군개천면나선리나동마을전경 나동마을은고성군개천면청광리‘박진사고가’에서 국가지원지방도 제30호선을 따라 진주시 이반성면 방향으로가다오봉산로초입에서우측나선지방면 입구에있는전형적인농촌마을이다.최근고성군제 1호 농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되면서 ‘무지돌이마 을’로불리기도한다.7개산봉우리와5개의계곡,크 고 작은 3개의저수지,10여주 정자나무,산과 들 온 갖야생화와산새소리,밤하늘초롱초롱한별들과마 을 앞 개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천혜의청정 농·산촌 마을이기도하다. 500여년의역사를지닌나선리나동마을은조선조초 비라사(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사찰명을 따서 비 라동 또는 나선리(羅仙里,당시 진주목 관할)로 하였 으며,나선리는본래창원군진전면으로1914년행정 구역 통·폐합시 나동리(羅洞里)와선동리(仙洞里)를 병합하여나선리로 하여고성군 개천면에 편입되었 으며,나선리의자연부락 나동마을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성지역에 충헌공파 후예는 3개 문중이 산재한다. 충헌공(휘척)의증손으로보문각대제학을지내고밀 성군(密城君)에 봉해진 휘 윤문의 아들 6명 중 장자 판서공(휘 밀양)의 후예와 차자 대제학공 휘 윤문의 후예, 넷째 정언공휘 삼양의후예로 이중 라동은 대 제학공의 후예 완천당공이 양주에서 기묘사화의 화 를 피해 지금의고성군 구만면 주평리에 은거하면서 고성에 세거하게 되었으며, 라동은 완천당공의 7대 손 휘 근(瑾)께서 입향,400여년의집성촌으로 이어졌 다.일제 강점기에는 강,김,박,성,윤,이,임,전,정, 최, 허, 흥, 황씨 등13개 성씨 64가구가 살았는데 이 중 박 씨 29 , 이 씨 12, 윤 5가 구 등이 고 19 3 6년 부 터 19 80년 까지 사이에 대부분 이사를 떠나고 김, 심, 정, 황씨는 각 1가구,이씨 4가구,박씨 21가구로 박씨 집 성촌이되어지금에이르고있다. 특히 지역의토반으로 성장하면서 높은 도덕성과 책 임의식을갖고마을에지대한공헌을통해박성의위 상을 정립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어 그 명성 또한 자 자하다. 나동마을 뱚선원세계와입향약사 입향조휘근(瑾)의재사영모재(永慕齋) 박효유 교지, 통정대부돈영부도정 (1888년) 박효유의 부 인 숙부 인 교 지 뱚나동마을에끼친문화븡사회적변화 마을입구에세워진공적비(우측부터박용보,박승은) 뱚 나동마을의후예 마을 회관(체험관) 건립기, 대지와 거금을 출연한 박용덕 현종을 기리고 있다. 지난 5월5일성암 박용덕 현종이 젊은청년들과 고성입향조 완천당공의 유허비각을찾아함께하고있다.(함안가야읍검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