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2021년5월31일 월요일 8 (제173호) 특 집 여행을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 여행이 끝에 서 가슴 뭉클한 감동 하나를 건져 온다면 행복한 일이다. 울산 으 로 가 는 동 안 몇 해 전 보 았 던 창작오페라 븮고헌예찬븯의 감동 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늘은 울산지역이 명문가인 밀양 박씨 송정문중을 찾아가는 길이다.송정문중은 조선 후기 울산 지역 사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가문이다. 과환과 문한이 끊 이지 않았으며, 울산지역에 문풍을 일으킨 가문이다. 또 한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고헌 박상진 의사를 배출한 가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에 와서도 창릉 박용진 선생과 같은 훌륭한 선비를 배출하는 등 영남유림의 변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유가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어오는 명문이다. 송정마을 은 무룡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마을 외 곽으로는 학의 날개처럼 펼쳐진 울창한 송림과, 괴천정, 봉산 정,송애정사,양정재,고헌생가,경헌고택과같은건물이있다. 밀양박씨는 신라 경명왕의 맏아들 밀성대군 박언침이 관향 조이다. 울산시 북구 송정마을에 사는 박씨 가문은 고려 공민 왕 때 밀직부원군을 지낸 박중미의 후손으로,밀양박씨 밀직부 원군파에 속한다.국간 박진록(대제학),죽은 박중미(대제학), 귀림 해(대사헌)3대에 걸친 영달로 밀직부원군파는 영남지역 의 명 문 벌 족 으 로 우 뚝 선 다 . 박 중 미 의 현 손 박 영 손 은 홍 문 관 교리를 지냈으며 청풍당(淸風堂)이란 사호(賜號:임금이 내린 호)를 받은 훌륭한 선비였다. 이어 승선헌 박정, 지족당 박윤 청,경재 박인이 벼슬에 나갔으며,괴와 박석의 아들 노계 박인 로는 한국문학사에서 길이 남을 가사문학의 대가이다.죽재 박 사신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오졸자 박돈과 국담 박현, 매 산 박민수(대암 박성에게 출계)다.오졸자 형제는 지산 조호익 의 제자로 영천 임고서원 병배시비에 적극 참여하여 의리와 명 분이라는 대의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 국담 현의 아들이 바로 울산으로입향한괴천박창우이다. 송정박씨는 밀직부원군파 지파로 조선 후기 괴천(槐泉) 박 창우(朴昌宇)가 영천에서 송정으로 이주한 이후 누대로 세거 하면서 일으킨 가문이다. 울산지역 대표적 명문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송정박씨(松亨朴氏)라고 일컫는다. 괴천(槐 泉) 박창우(朴昌宇)는 영천 괴하리에서 태어나 28살(1636년) 에 울산에 입향하였다.그는 미수 허목의 문인으로 미수로부터 ‘남주제일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주역에 통달하여 역남 선생이라고불렸다. 하계 박세도는 괴천 박창우의 둘째 아들이다.성균진사로 아 버지의 뜻을 이어 구강서원 창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서울에 7년간 거주하면서 사액을 청원한다. 미수의 문인으로 현달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명리를 탐하지 않고, 븮계자칠자 설븯을 남겨 송정문중의 문기를 확립하였다. 하계의 증손 박성 창과 아들 신제 박사은과 그 종제인 인재 박사염에 이르러 송 정문중은 경제적 기반이 확립된다. 울산지역의 풍부한 물산을 배경으로 만석지기 재산을 형성한 송정문중은 지역사회의 지 도그룹의 선두에 서서 빈민을 구휼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실천한다. 또 용복(容復), 헌복(憲復), 정복(定復), 의복(宜 復),희복(喜復)등 은포 박사유의 아들 다섯 분이 특히 걸출하 여,오범 또는 오부자집으로 불리게 된다.5형제가 서당계를 발 전시키고 일가를 규합하여 문풍을 진작해 나간 결과 박용복의 아들 박시룡과 박시규는 대과에 급제를 하게 된다. 이때부터 송정박씨는 자손이 번창하고 문운이 크게 일어 무수한 인물이 배출된다. 과환, 문한, 혼맥, 범절로 도내에 명성을 얻게 된다. 소암 박시무의 가학전승으로 송은공 박용복(북부도사), 진사 박시귀, 진사 박기진, 운담 박시룡(문과, 홍문관교리), 간운 박 시규(문과,규장각 부제학)이 배출되었으며,학행으로 묵은 박 시주,창고박규진,서암 박시훈,술은 박대진 등이문명을날렸 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은 밀양박씨 송정문중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왕산 허위(許蔿)의 제자가 되 어, 왕산의 권유로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 으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사퇴하고,1912년부터 대구에 상덕태 상회(尙德泰商會)를 세워 독립운동의 군자금 조달 및 연락 거 점으로 삼았다. 1915년 1월 대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 했고,같은 해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결성된 풍 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통합하여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총 사령에 취임한다.그는 대한광복회의 이념을 공화주의에 두고, 그실천적방략은무장혁명노선을표방한다. 항일 독립운동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김좌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좌진은 바로 고헌의 의제였다. 고헌은 백야 김좌진과 의형제를 맺고 자신이 총사령으로 있으면서 부 사령 이석대가 순국하자 백야를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대한광 복회는 재외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즉 국내에 100여 개의 거점을 두고 군자금 을 모아 무기 및 장비를 갖추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히 혁 명을일으켜공화주의독립국가를건설하려고한것이다. 그러나 군자금 모금이 여의치 않자 강제모금을 추진하고 친 일부호를 처단한다. 그러나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조직망 이 발각되어 채기중·김한종(金漢鍾)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 아대구감옥에서순국했다. 고헌의 집안은 시례가문이었다. 친양가 아버지가 모두 문과 에 급제한 유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 다. 만석군의 부를 가지고 있는 울산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 난 고헌은 어렵고 힘든 독립운동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 유 림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조국의 위기상황에 분연히 일어났고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며 스스로를 개혁하여 조국 독 립을 위하여 온 몸을 불살랐던 혁신유림. 이들을 지배하고 있 던 사상은 유학이었으며, 고헌이 바로 그런 인물 중 우뚝한 업 적을남긴분이다. 뱚母葬未成 어머님장례마치지못하고 뱚君讐未復 임금의원수도갚지못했네 뱚國土未復 나라의땅도찾지못했으니 뱚死何面目 무슨면목으로저승에가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그 사령관으로 무장투쟁을 벌였던 박상진(朴尙鎭)이 지금부터 꼭 100년전인 1921년 8월 대구감 옥에서 사형당하기 하루 전에 쓴 시다.1918년 2월 고헌 박상진 은 생모의 장례식에 참석한다.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 은 곧 죽음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이었다. 왜경에 체포된 박상 진은 당당하게 말을 타고 감옥으로 향한다. 그리고 4년의 옥고 를치르고형장의이슬로사라졌다. 박상진은 선비다. 유교적 도덕률을 실천함에 있어서 누구보 다 철저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 해 고향집을 찾았으며, 나라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 위 대한 독립운동가이다. 아버지 박시규가 아들에 대상 때 적은 제문일부를옮겨둔다. 아아!오늘은바로네가죽은날이다.너의죽음을온천하사 람들이슬퍼하고,애석하게여기는말들이다한입에서나오는 듯하다. 네가 죽던날, 옥졸은 울먹이면서 븯의인이 죽으니 천지 가깜깜해지고시장에는점방문이모두닫혔습니다뷻고전하였 다.-중략-너를장사지내던날,길거리에가득한남녀들이상여 를따라통곡하자,길을가던나그네까지도눈물을흘리지않는 이가 없었으니, 모두들 븮죽었어도 오히려 영광븯이라고 하였다. 중국인 原憲(원헌)은 바로 肅親王(숙친왕)의아들인데, 내가 너 의아비라는 말을 듣자 다시 옷자락을 여미고 꿇어앉아 이르기 를뷺아드님의훌륭한의열과참혹한죽음은중국의각신문에도 자세히 보도되었습니다.뷻 하며, 만사 일절을 써서 나에게 주었 다.-중략-나는네가살았을때에는너의인망이이와같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었다. 아!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살았어도 그 시대에 아무 이익이 없고, 죽은 뒤에도 후세에 남길 만한 소문 이 없이 그냥 왔다가 그냥 가게 됨은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렇게하는일이지만만약너같이죽는다면슬퍼할것이없다하 겠다.내가왜어리석은사람처럼마음속에온갖슬픔을쌓아나 의생생한마음을상할필요가있겠는가? 창릉 박용진 선생은 울산이 자랑하는 울산 유림의 정신적 지 주이자 한국 유림의 거두였다. 선생은 울산 송정 밀양박씨 가 문에서 태어나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하여,도동서원,병산서 원, 임천서원 등 대현을 모신 큰 서원의 원장을 두루 역임하셨 고‘울주지’를편찬하고문집인창릉집을남겼다. 1988년 87세를 일기로 향리에서 선생이 타계하시자 선생의 소상을 치르는 송정동 자택에 2백여 명의 유림이 모여 추모하 고 선생으로 추대키로 결의하였다. 유림에서 선생으로 추대되 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정승 세 사람보다 선생 한 분 이 더 낳다는 말이 있다.울산지역에서 3백년 만에 선생의 칭호 를 받은 분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선생으로 추대되기가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알수있다. 금년에는 선생의 문집 븮창릉집븯이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에 서 국역 발간되었으며, 박종해 전 울산북구문화원장이 선친을 기념하기위해제정한븮창릉문학상븯15회시상식이있었다. 박종해 선생은 아버지의 선비정신을 기리고, 울산지역에 문 학 정신의 뿌리를 내리고자 퇴직금을 쾌척하여 문학상을 제정 하고, 해마다 올곧은 문학정신을 가진 작가들을 시상하여 븮창 릉문학상븯은 작가들에게는 매우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알려져 있다. 송정마을은 지금 개발로 몸살을 앓 고 있다. 한때 400가 넘었던 마을은 박 상진 의사 생가와 경헌고택 및 몇몇 정 자만남기고모두철거되고말았다. 송정 사람들은 울산시내로 옮겨 살 거나 아니면 대구나 부산 등지로 흩어 졌다. 그러나 송정사람들은 흩어진 것 이 아 니 다 . 송정에 세거 후 7-8대에 이르러 수 천 호로 족친의 수가 늘어났으나 지애 박시철을 중심으로 괴천공이 울산 지 역으로 이주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남이계를 조직하였으며, 양정제 박시준의 청재(淸材)로 문중을 구성하고 활발한 활동 을 벌이고 있다. 또 송정마을은 고헌 생가를 중심으로 문화재 단지로 지정된다고 한다. 고헌생가, 경헌고택이 있는 자리에 서당, 양정제, 봉산정 등이 이건되면 무룡산 아래 송정마을의 옛모습은 물론,새로운 전통 문화재 단지로 거듭나 울산지역에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볼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울산지역 명 문가 송정박씨의 오랜 역사와 정신, 그리고 삶의 흔적이 지역 시민의가슴에메아리로남을것이다. /자료제공김정현(수필가,대구향교 신문편집국장,대구향교 안동향교 논어맹자강사)E-mail:kim1435@hanmail.net 울산명문가탐방 밀양박씨송정마을 울산북구송정동문화재단지전경①봉산정②송애정사③양정재④고헌박상진의사생가 뱚 송정박씨의울산입향유래 괴천정,울산북구송정동43번지 뱚 광복회총사령고헌박상진 고헌박상진의사생가 뱚 송정박씨가문의번성 뱚 창릉문학상 창릉집 뱚송 정사람들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