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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8월31일 월요일 8 (제164호) 집성촌 탐방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은 함양박씨 동정공 후예의 집성촌 이다. 양과마을과 지산마을은 조선시대 후기까지 양과촌, 지 산촌으로 현재에는 5개의 자연부락을 통틀어 양과동이라 한 다. 장흥고씨, 경주최씨와 함께 삼성(三性)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곳으로,1400년 초 입향 이 지역에 세거하는 함양박씨 후 손들은 지역토반으로 성장하면서 양과동계 결성에도 많은 기 여를 해왔다. 입향 이후 향약을 제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동계 (同契)가수백년동안이어지고있다. 우리나라 향촌 계회 조직은 550여 년전에 결성된 강원 강릉 의 븮금란반월회븯(金蘭半月會)가 있고, 최장수 유계(儒契) 조 직은 530년 전 조직된 안동의 ‘우향계’ 400년 역사와 전통의 기록 ‘임계계회도’, 1565년에 설립된 전남 영암(靈巖)의 구림 계 등이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그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양과 동계는 1400년 초 결성된 조직으로 현존하는 동계로 최장수 동계이다. 이에 함양박씨 양과마을 입향과 양과동계에 대해 알아본다. 함양박씨는 중시조(휘 선)이후 선조님들이 관직에 따라 많 은 지역으로 세거지가 넓여진다.광주 양과동의 후손들은 제1 파 군기소감공(휘 지문)의 후손으로 어느 시기에 군기소감공 이 함양에서 전남 거평(현 문평면)으로 이거 했는지 기록을 찾을 수 없으나 군기소감공이 거평으로 이거한 후 이 지역에 난(亂)이 일어났는데 이를 수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설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지역에 함박등(咸朴嶝), 또는 함박동(咸 朴洞)으로 불리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세거상황 을알수있을만하다. 군기소감공을 비롯한 차남 경( 궝)은 문과에 올라 세자시강 원(世子侍講院) 시학(侍學), 셋째아들 휘 순(淳)은 군부총랑 (軍部摠郞)이며 휘 순의 아들 휘 원경(元慶)은 삼척군(三陟 君)에봉해져삼척박씨의시조로분적되었다. 삼척군의 묘소가 얼마 전 강원도 삼척에서 발견되어 경남 함양군 수동면으로 이장함에 따라 군기소감공이 아들(휘 경) 과함께전남거평으로이거했음을추정해볼수있다. 그러나군기소감공과아들휘경,손자홍저(洪貯,典儀令判 東部錄事), 증손 검(儉, 書雲副正), 현손 득춘(得春, 別坐), 득 시(得時,중직대부 사복경 홍문관 교리 지제교)의 묘소가 모두 실전되어 나주시 남평읍 정광촌 저존재 후면에 설단하여 제향 을받들고있어최초입향지인거평에는후손들이없다. 군기 소감공의 현손 휘 득춘은 경북 예천으로 이거해 갔고 차남 휘 득시는 호남지역 거평에 남았다. 그는 문과 급제하여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司僕卿)과 홍문관 교리(弘文館 敎理),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으며, 합천이씨와 결혼,아 들 휘 선(鮮, 동정공)을 낳았으니 바로 황산마을 입향조이고, 광주 전남지역의 대성으로 번성한 동정공파의 파조로서 號는 유곡자(柳谷子)이다. 동정공 휘 선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지제교 동정 (同正)을 역임하며 명성과 덕망이 세상에 크게 떨쳤다. 세종2 3년(1441년)졸하였다. 동정공의 장남 휘 수지(遂智)의 字는 희안(喜安)호가 지봉 (芝峰)이다. 세종3년(1421)에 출생하여 어머니를 지효(至孝) 로섬기고제매(弟妹)를어루만져우애가지극했다. 사마시에급제하고감찰어사,세자익위사좌익찬을거쳐예 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노모를 위해 부임하지 아니하고 남 평 현감으로 치적을 올려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뒤에 문과에 올라 홍문관 교리 지제교,북평사 집의를 역임했다.사후에 좌 찬성에 증직되었고, 보성 유산사에 배향 되었으며, 아들 오형 제(이온, 이량, 이공, 이근, 이신)를 두었으니 이들 오형제중 장남 이온과 사남 이근이 양과마을과 지산마을에 거주하며 지역의 문풍을 이끌며 향촌사회를 이끈다. 이는 1716년 작성 된 동계좌목(同契座目)에 성균진사 휘 이온(以溫)이 수좌(首 座)에있고,다음은장사랑이근(以勤)공이있어짐작해본다. 지봉공(휘 수지)의 효심에 대해 세조의 각별한 배려가 세조 실록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어 옮겨본다. 세조1권, 1년 (1455 을해) 7월 12일(을유)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예산 현감(禮 山縣監) 박수지(朴遂智)는 그 어버이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함평 현감 (咸平縣監)으로 고쳐 제수하였습니다. 구법(舊法)에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가부임 전에그 사유를갖추어계청(啓請)하는것은허용하고, 만약 부임한 뒤에는 들어 주지 않고 이내 파직하게 되어 있는데, 이제 고쳐 차 임(差任)하였으니, 이는입법한 것과 위배되는일이니, 청컨대이를개정 하소서.”하였다. 동 정 공 의 차 남 휘 수 화 (遂 和 ) 의 자 ( 字 )는 불 유 (不 流 ), 號 는 황산(黃山)으로 세종11년(1439년)에 출생하여 세 살에 아버 지동정공이돌아가시자어육(魚肉)을입에넣지아니하여삼 세효자(三歲孝子)라 칭했다. 진사시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 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아들 형제(이관,이홍) 를두었으며,이들은전남담양으로이거해집성촌을이룬다. 동정공의두 아들과 손자 7명모두는효자로도유명하다.또 손자모두현달하여가문을크게번성하였다. 청백리 휘 수지의 장남 이온(以溫)은 진사(進士)시에 합격 후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으며, 손자 휘 곤손은 갑산교수이고, 증 손 휘 후 생 ( 厚 生 )은 교 수 (敎 授 ) , 현 손 휘 인 (認 )은 중 추 부 사,근(謹)은 군자감정이다.중추부사 휘 인(認)의 장남 휘 천 정(天挺, 호 황탄)은 성균 진사로 1589년 정여립의 변란인 기 축옥사(己丑獄死) 때에 상소를 올려 지적했다. 당시 상소는 간신을 소탕해야 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간신들에 의해 무고 혐의가 씌워지기도 했다. 1592년 임란에 거병 창의하여 군량 을 책임지었다.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의하 면 1592년 6월 3일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으로 군량미 운반 을맡고있음을기록하고있다. 황탄공의 아우 휘 종정(宗挺)은 스스로 호를 난계(蘭溪)라 하고, 선조9년(1576) 사마시에 등과한 후 사학 연구와 후학양 성에 매진하며 당파에 휩싸이지 않는 등 그 사람됨을 후한(後 漢)의유명한학자곽림종에비유되기도했다.후에사림의천 거로 장원서 별제와 계사년(1593)에 황원(현 영암군의 일부) 목사를 역임하고, 정유재란(1597년)에 아버지(휘 認)와 숙부 휘 근(謹)과 함께 창의하여 군량미 등을 모아 해안을 따라 임 금의 행재소로 향하다 영암에서 아버지에게 달려드는 적병을 몸으로 막다 몸에 상처를 입어 사망하여 광주 효우동 분작산 에 치장하고 뒤에 정려가 내려졌으며, 죽산인 안방준 가(家) 에장가들면서광주에서처가인보성으로이거하게된다. 교수공 휘 후생의 차남으로 군자감정을 지낸 휘 근(謹)은 정유재란에형휘인(認)과조카난계공과함께창의하였으나 영암에서 형과 조카가 왜적에게 화를 당하여 시신을 수습하 여 선영에 안장하고 특제로 통정대부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 며후손들은광주,전남화순등에이거해갔다. 청백리 휘 수지의 차남 휘 이량(以良)은 세자좌빈객 이조참 판을 역임하였고, 아들 사형제(태손, 만손, 천손, 억손)을 두 었으나 장남과 차남은 후사가 없고 삼남 휘 천손(千孫 )이 또 사형제를두면서번성하였으며전남보성으로이거해간다. 청백리 휘 수지의 삼남 휘 이공(以恭)은 나주, 곽산, 문의, 옥천, 익산, 청도, 남평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 통훈대부 직장,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의 차남 휘 명손(命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전한, 세자시강원경연지제 교 겸 춘추관편수관,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나주에 선정비가 세워졌으며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은퇴하여 은거하였으며 광 주승람지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후손들은 광주 송정리소촌동과장성일대에세거지를이루고있다. 청백리 휘 수지의 사남 휘 이근(以謹)은 성균진사로 학식이 높아 여진훈도로 후학을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쳤으며, 후손 들은광주나주지역에거주한다. 청백리 휘 수지의 오남 휘 이신(以信)은 생원으로 장흥(현 보성지역)에이주해후학양성에이바지한다. 동정공의 차남 삼세효자 휘 수화(遂和)의 두 아들(以寬, 以 洪)은 아버지에 이어 효자로 려묘하는 등 그 효 는 남 달 랐 으 며 전남담양으로이거하였고,창평절산사에배향되었다. 장남 휘 이관(以寬)은 세조4년(1460년)에 출생하여 1492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는 사헌부 장령, 성균관 사예, 홍문 관 전한, 시강원 보덕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순창, 담양, 남원, 강화, 홍주 등 일곱 고을 수령을 지냈으며, 동생 휘 이홍(以 洪)은 사마시에 입격하고 명경(明經, 경서에 정통한 사람을 뽑는 과거)으로 등제하여 홍문관 정자로 남곤 심정의 간흉을 소변하다다가 파직되었다. 정암 조광조가 용심순근(用心醇 謹)효제숙저(孝悌夙著)로 천거했으나 나아가지아니하고창 평현(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의 동쪽 월봉산 아래에 은거하며 덕성을 함양하며 시의득실(時議得失)을 들으려 아니하니 당 시의제현이추중(推重)하였다. 백형(이관), 눌재 박상, 육봉 박우, 모재 김안국, 사재 김정 국 등과함께 논도(論道)강학(講學)하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 연주육현(聯珠六賢)으로칭했다. 형제가담양창평으로이거하게된연유는이들의효심으로 이어진다. 형 휘 이관 公이 모친을 부양하기 위해 담양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어머니 김씨는 공부(公俯)로 가시기를 싫어하 므로아우월영공(휘이홍)으로하여금모친을봉양하기위해 창평유곡(지금절산)으로이거시키고담양부에근무하며공 지(供旨, 맛있는 음식을 이바지)할 음식을 먼저 맛본 후 조석 으로창평유곡까지보내기도하였다. 보옹공(휘 이관)의 아들 휘 명세(命世), 명심(命諶), 명순 (命純), 命祐(명우) 등 사형제가 진사시에 합격 진사를 지냈 으며 이들은 아버지의 고향 광주와 무안 등지에 이거하고 보 옹공파라 한다. 보옹공의 증손 휘 숙( 씸)은 의병장 고경명의 장녀와혼인하였으며,임란에창의하여많은전공을세웠다. 월영공(휘 이홍)의 아들 휘 유신(維新,), 유철(維哲), 유년 (維年), 유성(維成), 유길(維吉) 등 오형제를 두었으며, 이중 장남 휘 유신은 직장(直長)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휘 오 경(吳卿)과 진경(眞卿)은 장사랑이고,장경(長卿)과 인경(仁 卿)은 효성이 출천하여 모친의 병환에 단지하고 려묘하여 호 남절의록에 올랐다. 월영공의 넷째 휘 유성은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알려지고 호(號)가 천곡이므로 천곡처사(泉 谷處士)로 칭했다. 그의 장남 휘 원경(元卿)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문아(文雅)하고 창평 학구당을 세웠으며, 차남 휘 형경 (亨卿)은 문학으로 만헌처사(晩軒處士)로 불리었고, 삼남 휘 정경(貞卿)은 둔세(遯世)하여 학구(學究)에 전념하여 구봉 처사(九峯處士)라 하였다.월영공의후손들은전남 담양군 창 평면유곡리절산부락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휘 동정공(휘 선)이 거평에서 황산마을로 이주하여 아들(수지·수화) 형제를 두면서 기반을 닦는다. 이 어 동정공의 손자(이온·이량·이공·이근·이관·이홍) 대에 이 르러 더욱 번창해지면서 인근 마을인 양과촌과 지산촌으로 이거했고, 현재는 동정공의 5대손 황탄공 휘 천정, 사복시정 휘 민정, 참봉 휘 첨, 휘 인봉의 후예들이 선조의 유업을 기리 고있다. 광주 남구 양과동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마을 주민들이 145 6년 경 조직한 향촌계로서 우리나라 향촌계중 제일 오래된 계 의 하나이다. 당시 좌목(座目)을 보면 청백리공 휘 수지의 아 들이온·이근형제가수위에있고,사헌부감찰을지난수화의 아들 이관,이온의 아들 곤손 등 여러 명의 후손들이 등재되어 있다. 동정공의후예들이향촌사회를 이끌어온것은허백당성현 의 문집에서도 나타난다. 당시 청백리공의 아들 이온은 이종 사촌 형인 허백당에게 광산향교를 중수하면서 기문을 부탁, 허백당은동생의청을받아들여기문을짓는다. 허백당 성현의 부친 성염조(成念祖)의 전배(前配)는 박고 (朴깰)의 딸인 죽산 박씨(竹山朴氏)이고 후배(後配)는 안종 약(安從約)의딸인순흥안씨(順興安氏)인데,성현은후취안 씨소생이다.안종약은순흥안씨의 시조 안자미(安子美)로부 터 9세(世)에 해당하는 인물로, 장남 안구(安玖)를 비롯하여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장녀가 성염조에게 시집갔고 차녀 는 박수지(朴遂智)에게 시집갔다. 박수지는 함양 박씨(咸陽 朴氏)의 시조 박선(朴善)으로부터 12세에 해당하는 인물이 고, 박이온은 박수지의 장남으로 진사(進士)였다.-참고문헌 昌 寧成氏族譜, 肅宗35(1709)順興安氏族譜- 이처럼 양과마을에 거주 한 함양박씨는 광산향교 중수의 실질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지역의유풍(儒風)을이끌었음을알수있다. 향약을 시행하는 장소인 양과동정은 광주에서 포충사를 가 다보면 황산마을을 조금 못가 자리하고 있다. 양과동정의 다 른 이름은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高景命)의 별서(別 墅)라고도 한다. 간원대는 이곳 출신들이 간관(諫官)으로 많 이 배출되어 여기에서 국사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 름이라고 한다.이곳은 동약(洞約)과 향약(鄕約)등의 시행처 로도 사용되었으며, 보통 정자와는 다르게 마을 사람들이 모 여서 지방자치를 위한 회합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정 에 상소를 올릴 때에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자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바람 막는 판이 설 치되어 있다.기단은 바른 층 막돌 쌓기를 하고 덤벙주초를 놓 고서 원형기둥을 세웠다. 사방은 벽이 없이 개방된 공간이며 우물마루를 깔았다.천장은 연목(椽木)의 연골이 그대로 들어 난 연등천장으로 하였으며, 홑처마이다. 또한 목재의 모양이 나 기둥 상부에 븮S븯자형의 헛첨차만을 이룬 단순한 형태는 공 포완성 바로 직전의 형태로, 이 정자가 오래된 구조물임을 알 수 있다.기와의 문양은 숫막새는 날개를 펴고 있는 백조 문양 이며,암막새는거북선모양이다. 양과동정은 삼한 또는 신라시대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하나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고,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건립 연대는알 수없다.정자의제액(題額)은우암 송시열(尤菴宋 時烈 1607∼1689)이 쓴 것이다.정자 내에는 동정입의서(洞亭 立議序)와 중수기(重修記), 고경명의 제양과모정(題良苽茅 亭),음성인 박광옥(朴光玉)의 차유곡모정운(次柳谷茅亭韻), 제간원대(題諫院臺), 향약 등과 관계된 현판이 걸려 있다. 관 련된 문서는 1648∼1889년에 작성된 동계좌목(東契座目)2권 과 상소문 5매가 있다. 이렇듯 건물에 관련된 문서와 건축 양 식을미루어건립연대는조선시대로추정된다. /자료제공박호진동정공파총무이사 글정리·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양과동함양박씨와양과동계(良苽同 契) 양과마을전경. 뱚▶입향약사 뱚▶양과동계(良苽同契) 주요 공사 실적현황 고 고객 객의 의새 새로 로운 운가 가치 치와 와미 미래 래 를 를건 건설 설하 하는 는성 성진 진종 종합 합건 건설 설 고객 중심, 가치창조, 미래선도 라는 경영이념을 한 마음 한 뜻 으로 실천하고 있는 저희 봑성진종합건설 임직원 일 동은 고객 여러분으로부터 더욱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최 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봑성진종합건설 대표이 사 박남희 영천본사:경상북도영천시북안면운북로1631 TEL:054)337-2687 대구지사:대구광역시북구구리로199,2층 TEL:053)322-2687 율하동해도프라자신축공사 세진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이노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세민타워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영우빌딩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부산시연제구거제동1469-13근생시설신축공사 긴급신고공동관리센터신축공사 용암면사곡리공장증축공사 농업회사법인㈜제이팜스제3공장신축공사 경북신문사옥신축공사 동호동장례식장신축공사 신양리다세대.다가구주택신축공사(2개동/총16세대) 안동영명학교예능교육관증축건축공사및내진보강공사 ㈜한국단자부품근린생활시설신축공사 행복나눔파인토피아봉화조성사업 금호공업고등학교장애인편의시설승강기증축건축공사 청도군여행자센터건립공사(건축,기계) 고덕동다세대주택및근생시설신축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