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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津三·一義擧記念碑(용진 3.1의거기념비) 경치좋다 운길산은 기세가 운중에 솟았고 돌아든다 북한강수 양양하게 흐른다. 이 노애른 1914년에 건립한 사랍 경진학교 교가의 머리구절로서 우리 배나무 용진의 주위환경을 그린 것이다. 오호라! 우리 강산은 산수가 수려하고 토질이 비옥하며 사계절이 뚜렸하기에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이땅에서 우리 조상들은 근면하고 슬기롭게 나라를 보위하며 반만년 긴 역사동안 문화민족으로서의 국권을 수호하기에 노력하였건만 오호라 우리는 한 동안 왜적의 더러운 발굽아래 우리의 강초를 짓밟히게 되었으니 이것이 즉 1910년의 경술년 국치였다. 국권이 왜적에 강탈된후 독립의 기회만 오기를 기다리던 중 고종황제의 승하하심을 계기로 기미년의 3.1운동이 노도의 불길처럼 일어났으니 타오르는 애국애정이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였으며 적들의 총칼을 두려워하였으랴. 성난 우리 민족은 파도처럼 거세게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드높여서 서울에서 시골로 방방곡곡을 메아리 치게하였다. 3월 초8일 당시 서울에서 유학중이던 이종호학생의 연락으로 우리 배나무 용진에도 의거소식이 전해졌으니 용진교회도 이정성장로를 위시한 교회대표와 동리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를것을 합의한 후 경진학교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15일을 거사일을 정하였다. 거사당일에는 교회는 물론 운동리가 총동원되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드높이 외치며 진중리 조안리 봉안팔당을 거쳐 덕소면 사무소와 헌병분견소 주위를 돌며 만세시위를 감행하던중 서울에서 출동한 헌병과 충돌하였다. 이에 선두에서 만세를 외치던 이정성 김춘경 김윤경 정일성 제씨가 현장에서 구속 압송당하고 이튿날에는 용진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주동자및 동리에서 연행된 자를 합하여 13명이 추가로 구속연행되었다. 그 후 이분들은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동년 4월 25일 이정성(42) 김춘경(26) 김현모(41)는 징역 1년6개월 김덕여(45) 정일성(18) 이갑동(25) 오성준(35) 김덕오(38) 이정운(36) 김윤경(52) 이건흥(34) 전태연(22) 김현유(39) 박경식(38) 문광채(59) 이내안(37) 박수만(23)은 징역8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형량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지만 동년 5월 30일(형강 282호) 경성복심법원과 동년 7월 11일(형상336호) 고등법원에서 각각 원심대로 판결함으로서 미결통산 20개월에서 12개월을 서대문 원산 함흥형무소에서 각각 복역하였다. 그 고난과 치욕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선열들의 울분과 억움을 어찌 위로하랴 이들은 출옥한 후에도 국내외의 항일운동에 참여함은 물론 지역사회발전에도 선구자의역할을 담당하여 그 흔적을 여러곳에서 찾아볼수있다. 이제 우리리는 그들이 간직하였던 그 순수한 사랑과 또 우리에게 물려준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본받아 후손들에게 길이 계승하고자하는 미애에서 삼가 여기에 우리의 정성을 모아 기념비와 탑을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