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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과감한 전법으로 재반격을 이룬 매슈 리지웨이 제 8군 사령관(1950.12~1951.4) 2대 유엔군 사령관(1951.4~1952.5) 1895년 미국 버지니아 주 포트 먼로에서 출생한 리지웨이는 1917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제82공수사단을 이끌고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참가하였으며 곧 제18공수군단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지중해와 카리브해 지구사령관을 거쳐 1949년부터 육군본부에서 작전·행정참모부장으로 근무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12월, 당시 한국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제8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약 4개월 후인 1951년 4월에는 맥아더 원수의 후임으로 미 극동군 사령관 및 제2대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뛰어난 지휘관이었던 그는 1·4후퇴 당시 강력한 지휘력으로 아군 전선을 튼튼하게 만든 후, 과감한 전법을 구사해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쳤다. 킬러작전(Operation Killer), 리퍼작전(Operation Ripper) 등을 통해 중·동부전선에서 적에게 계속적인 압박을 가해, 공산군 주력을 격파하고 그들에게 반격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북상시키는 데 성공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1952년 5월 나토군 사령관으로 전임될 때까지 13개월간 유엔군 사령관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1953년 대장으로 진급한 후 제19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1955년 예편했다. Douglas MacArthur 1880.1.26~ 1964.4.5 Matthew B. Ridgway 1895.3.3~1993.7.26 Walton H. Walker 1889.12.3~1950.12.23 11 10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더글러스 맥아더 초대 유엔군 사령관(1950.7~1951.4) 맥아더는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태어났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제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1930년 대장이 되었으며 제13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1937년 제대했다. 하지만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인 1942년 초, 현역에 복귀하여 미 서남태평양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1945년 7월에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했고, 이어 8월에 일본을 항복시킨 후 미 극동군 사령관으로서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9월 15일 대담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주변의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의지로 관철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10월부터 북한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11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서울 이남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자 그는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대만군의 활용 등을 주장했다. 이로 인해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겪었으며 1951년 4월 모든 사령관의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을 떠났던 맥아더는 귀국 후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다. 그는 의회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단지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1964년 4월 5일 명예로운 일생을 마감했으며 버지니아 주 노퍽에 묻혔다. ‘워커 라인’의 주인공 월턴 워커 제 8군 사령관(1948.9~1950.12 ) 워커 장군은 14세에 군사학교에 입학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12년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제1차 세계대전 때 미 제5사단 기관총대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전차전의 귀재였던 조지 패튼 장군 휘하에서 군단장을 맡아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다. 워커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나치의 롬멜 부대와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미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오게 된다. 당시 낙동강까지 밀려나 있던 한국의 상황을 보고 워커 장군은 ‘워커 라인’, 즉 낙동강 방어선을 결성하여 북한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고 각 부대에 명령했던 그는 결국 낙동강 전선을 사수했다. 이를 통해 전세의 대역전을 가져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으며, 이후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불시공격을 받고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해 재정비하던 1950년 12월, 아들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 주기 위해 가던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워커 장군은 사후 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워커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서울 광진구 광장동 일부 지역을 워커힐(Walker Hill)로 명명하였다. 유엔군의 주축을 이룬 미군은 우리나라의 자유수호와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제1·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전쟁영웅들은 6·25전쟁의 전세를 반전시킴은 물론 전후 국군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발휘했다. 유엔군 지휘관으로 활약한 이들의 헌신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2세들의 참전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현역 장성의 아들은 모두 142명이었으며, 그 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유엔의 이름으로 6 ·25전쟁을 이끈 주요 지휘관 Key Commanders of the Korean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