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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때인들 넘어야 할 산이 없고, 어느 시대인들 풀어야 할 과제가 없으랴만, 아무리 큰 문제라도 나라 잃은 것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에 3대가 몸 바친 올곧은 역사, 이것이 바로 임청각 사람들이 걸었던 숭고한 길이다.
이곳 임청각은 5백년 역사를 이어온 고성이씨 종택이다. 그 종손인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의병기지를 세워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디뎠고, 앞장서 서양의 과학 문명과 공화주의를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는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으니, 혁신유림이라 일컬어진다.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혁명의 길을 택했다. 안으로는 조상 위패를 없애고 노비를 해산시켜 근대사회로 길을 열고, 밖으로는 독립전쟁을 목표로 삼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려 고 나섰다. 이 선택은 가지고 누리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구나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길임을 각오한 망명이었다. 군대를 기르자면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을 모으자면 안정직인 생활터전을 갖추어야 했다. 선생이 경학사 대표가 되고 광업사 등 기초조직을 만든 것은 동포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정착시키는 일이며, 신흥강습소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 군을 길러낸 것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역사였다.
10년 가까운 노력은 한족회와 서로군정서를 만들어냈고, 특히 서로군정서 최고지도자인 독판을 맡아 청산리전투 승전에 기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독립전쟁의 디딤돌을 만들고, 군사통일회의와 대한통의부, 정의부를 지도하면서 군사통합과 동포사회 운영을 지도하였다. 또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다시 이념으로 나뉘자, 선생은 통합운동의 구심점이 되었 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바꾸면서 초대 국무령으로 선생 을 추대하였으니, 독립운동사에서 선생의 위상을 말해준다. 1932년 만주 지린에서 74세로 순국할 때까지, 선생은 나라를 지탱하고 되찾아 세우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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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가족들도 여기에 함께 나섰으니,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이가 열 분을 넘는다. 아내 김우락, 아들 이준형, 자부 이충숙, 손자 이병화와 손부 허은은 선생의 활동에 늘 함께했다. 국내에 남아 안동 3·1운동의 막을 연 첫째 동생 이상동을 제외하면 나머지 가족들 은 망명하거나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에 몸 바쳤다. 둘째 동생 이봉희는 만주에서 동포사회의 정착과 안정에 기여했고,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이광국은 백부가 선택한 투쟁의 선두에 섰다. 선생이 가리키면 가족들은 모두 그 길로 나선 것이다. 여기에 선생의 어린 당숙인 이승화와 사위 강호석, 매부 박경종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이 순국한 뒤 가족들이 임청각으로 돌아왔지만, 투쟁의 삶은 끝이 아니었다. 감시와 핍박에 시달리던 아들 이준형은 1942년, 하루를 더 사는 것이 하루 치욕을 더할 뿐이라며 목숨을 끊어 항거하였다. 변절자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의 외침은 겨레의 양심을 지킨 큰 울림이었다. 광복이 되었어도 고난은 이어졌고 임청각도 원형을 되찾지 못하다가, 이제 옛 모습을 되살린다. 단지 건물 복원이 아니라 임청각 사람들의 나라사랑의 뜻과 헌신의 역사를 되살려, 앞으로 걸어갈 길을 가늠하는 데 목적이 있다.
나라사랑 바른길을 묻는 이라면 옷깃 여미고 고개 숙여 바람결에 들어보라
무릎 꿇어 종이 될 수 없다는 석주의 각오와 나라 위해 모든 것 바친 임청각 사람의 헌신 혹독한 수난에도 꺾이지 않은 장엄한 역사가 선명한 답이 되어 가슴에 새겨질지니
김희곤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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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 사람들의 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