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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③ 79 아래는 금오산 도립공원 들머리에 있던 「왕산 허 위 선생 유허비문」으로 필자가 다소 첨삭하였다. 현 재 이 유허비는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경내로 이전됐다. 왕산 허위 유허비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투쟁의 등불”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 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1896년 왜적은 날로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가 니 선생은 책을 덮고 선비의 매운 서슬을 떨쳤다. 그해 3월에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 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 에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명을 받들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1899년 평리원 재 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도도한 탁 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으로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밝고 넓은 경륜을 펼쳤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받치기에는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 역 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그 후 선생은 경 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아래 숨어 서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 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 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 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통감부를 무찌 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 러나 다른 의병들이 약속한 시간에 닿지 못하자 선생이 몸소 300여명의 결사대만 거느리고 동대 문 밖(현 망우리)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였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 다. 1908년 경기도 연천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 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렸다는 말인가! 그 해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 이 가시고 말았다. 선생은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 구미 왕산기념관 경내 ‘왕산 허위선생 유허비각’ 6 · 25전란으로 폐허가 된 허위 생가 터(박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