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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3년 11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1920년 12월 10일 일본사회주의동맹이 결성되었 다. 이 조직의 창립에도 조선인 유학생이 관여했다. 특히 박열은 원종린, 김약수 등과 오스기 사카에(大 杉榮),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사카이 도시히 코(堺利彦) 등과 교류하는 가운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자 아키타 우자쿠(秋田雨崔)는 박열 등 조선인 청년학생 1백 여명이 참석한 모임에서 박 열에 대해“선인(鮮人 - 당시 조선인에 대한 멸칭)도 그런 면이 있고 정열이 있는 사람이다. 일본 청년들 보다 훨씬 진실하고 인간적이다”라고 평했다. 이 시기 재일조선인의 아나키즘을 통한 일본에서 의 활동은 의혈투쟁이 주목된다. 도쿄 조선인의 의 혈투쟁은 1921년 1월 원종린, 황석우, 조명희, 정재 달 등이 결성한 의거단(義擧團), 혈권단(血拳團), 박살 단(撲殺團) 등의 단체 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일본 경찰은 혈권단 등을 주목했다. 도쿄 유학생들 가운 데 반민족 · 친일파를 습격하여, 폭력을 가하는 등 실 력행사로 응징하는 폭행사건이 자주 일어나자 이 단 체를 불량배들의 모임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주모자 박열을 쫓아 다 녔 다. 그는 여러 차 례 경찰에 의해 폭 행범으로 구류처 분 등을 받았다. 이 무렵 박열을 도 운 이가 변호사 후 세 다츠지(布施辰 治)였다. 그는 톨 스토이의 인도주 의사상에 영향을 받은 휴머니스트였다. 그런데 박열이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에 구속된 일이 있었다. 경찰이 변호사와의 면회나 정식재판을 일체 저지하고 정식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박열을 즉 결 처분하고 즉결구류형 집행을 하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박열의 장발을 깎으려고 하자 박열은 후 세 다츠지 변호사에게 급히 전보를 보내 구원을 요 청했다. 이에 따라 후세 다츠지 변호사에 의해 정식 재판이 신청되었고, 마침내 변론 결과 박열은 무죄 로 풀려났다. 1921년 11월 29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일조선인 사회주의 단체의 효시인 흑도회(黑濤會) 는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관련 기사를 보면, 이 와사 사쿠타로의 집에서 동우회와 흑도회의 구성원 20여명이 모였다. 당시 도쿄조선고학생동우회의 구 성원인 박열과 김약수, 정태성 등은 김판권(金判權), 조봉암, 권희국(權熙國) 등과 함께 조선인 사회주의 운동단체의 효시인 흑도회를 조직했다. 흑도회에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여러 사상들이 혼재 일본 아케보노미나미공원에 있는 ‘변호사 후세 다츠지 현창비’ 변호사 시절의 후세 다츠지(1880~  1953). 한국 정부에서 2004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