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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 동학농민혁명군(東學農民革命軍) 동학농민혁명군(東學農民革命軍)은 1894년 11월 우금티에서 침략적 외세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자는 '척양척왜 斥洋斥倭'의 깃발을 들고 항쟁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 사건이 전해지기 시작한 1894년 6월 말부터 공주 인근 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기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일부 농민군은 일본군의 철수를 철수를 요구하며 한양으로 진겨가겠다는 기세를 드러냈고, 공주지역은 충청감영만 점령되지 않았을 뿐 대부분 지역을 농민군이 장악하였다. 마침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부는 1894년 9월 10일 '척왜 斥倭' 즉 항일의 명분을 명분을 내세우고 재봉기 하였고, 북접농민군 또한 9월 18일 청산에서 봉기를 선언하고 서울로 가기 가기 위해 각각 공주로 향하였다. 여기에 공주에서는 공주창의소 의병장 이유상부대와 공주접주 장준환 세력이 참여하여 충청감영이 자리한 공주를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남북접 연합농민군 부대는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에 걸쳐 이인 利仁.효포 孝浦.늘티 板峙.대교 大橋 등의 지역에서 일본군.관군 연합군에 맞서 제1차 공주전투를 벌였다. 공주의 1차 전투에서 처절한 패배를 당한 동학농민군은 논산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뒤 11월 9일 공주 바깥 산줄기를 둘러싸고 우금티, 송장배미 산자락, 오실마을 산자락에서 처절한 결전을 감행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농민군은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묻혀있던 '송장배미', 해골이 여러 바지게가 나왔다는 '하고개', 점심을 먹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농민군이 즐비해 공동묘지가 되었다는 봉정동의 '승주골.은골.방축골' 등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