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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월의 독립운동가 •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 ·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 루이 마랭 선생 77 마랭은 이후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정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그가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에 앞장선 것이다. 1921년 4월 영국에서 활동하던 황기환이 파리로 돌아오자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은 빠르게 추진되 었다. 그 결과 1921년 6월 23일 파리 사회박물관에 서 한국친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루이 마랭(Louis Marin)의 주재로 시작된 회의에는 쥐스탱 고다르 (Justin Godart) 하원의원, 베르통(Berthon) 하원의 원, 문인 끌로드 파레르(Claude Farrere), 중국인 사 동발(謝東發, Scie Ton Fa)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 에서 루이 마랭은 먼저 “프랑스는 언제나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보호와 애정을 가져왔다”고 환기하며, “3,000만의 인구를 가진 불행한 나라 한국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역설했 다. ‘한국민들에게 도움을 제공함’을 목적으로 한 한 국친우회는 오스만 가(Blvd Haussmann) 93호를 본 부로 세워졌다. 루이 마랭은 초대 회장을 맡아 재정 등을 지원했다. 프랑스 한국친우회 결성 이후 루이 마랭은 연금 부, 보건체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는 한편, 인류학 및 민족학 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로도 활동했다. 민족 지학회(Société Ethnographique de France), 상업 지리학회(Société de géographie commerciale), 국제인류학 연구소(Institut international d'anthropologie) 등에서 활동한 그는 프랑스 지 리 · 인류학계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활동하다가 1960년 파리에서 숨을 거뒀다. 1945년 9월 일본이 항복하자 프랑스를 거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서영해는 루이 마랭에게 “회장님 은 한국이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 있을 때,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을 도와주고 옹호한 프 랑스의 고귀한 양심을 대표하는 분이셨습니다”라며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