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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 - KBS뉴스를 보았는데 민간인학살문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조사를 하지 않느 냐는 물음이었다. 답변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시 新婚으로 巨濟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親庭 가족들과이 沒 殺 당하였고 남편도 虐殺 당하였고 평생 靑孀寡婦로 節槪를지키며 살아오신분이 다. 1기위원회에 신청을 하지 못하여 부산상임대표께서 직접방문하여 申請書를 작성하여 釜山市 모시고 가셔서 接受 시킨 분이다. 또한 민간인학살신청건수가 人權侵害나 기타사건에 비해 壓倒的으로 많다. 그 리고 현재도 매일매일 신청이 각 지역에서 접수되고 있으며 아직도 진실화해위원 회가 무슨 機構인지 모르는 유족이 許多한 실정이다. 또한 신고를 하게 되면 不利益을 당할 수 있다는 不安을 느끼고 있는 유족들 에게 公營放送을 통해 민간인학살신청을 하여도 不利益을 당하지 않는다는 단 한마디의 言及만 하였어도 狀況은 바뀌어졌을 것이다. 민간인학살신청 弘報를 하 기위한 絶好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만 셈이다. 무늬만 독립기구이고 內實은 청와 대나 행정안전부의 눈치를 살피는 기구가 되어서는않될것이다. 유족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요구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70여년의 시간이 흘러갔으며 申請숫자가 가장 많고 피해규 모가 엄청난 민간인학살문제를 포스트에 올려 조사순위를 제일 먼저 開始해야 옳 다고 믿고 있다. 유족회는 1960년에 創立되었으며 彈壓과 監視를 받아온 세월이 70여 년이 되 었다. 모진 風塵(풍진)세월을 죽어서는 않된다는의지 하나로 유족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사회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가며 中斷된 過去事復元을 위한 입법투쟁을 十數 년간 展開해오면서 진실화해위원회가 문을 열게 되었다. 功致辭를 하고 대접을 받자는게 아니다. 눈치를 살피고 忽待(홀대)를 받으려고 신청하는 게 아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公平正大한조사를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생생하게 記憶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