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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2-18
독립유공자 간취 김희봉 선생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15세손이며 1875년(을해)생으로 효우독실한 유가의 후예다. 일제강점을 못내 비통해 하던중 1919년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우이며 훈호인 심제 조긍섭 선생을 움직여 독립선언서를 제작 이를 수천부 등사하여 창녕장날을 기해 살포하려다 일경에 발각 체포되여 공모한 조심제 선생과 공산 송준필 선생 등 동지들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삭발하려는 간수의 이발기를 빼앗아 던지고 수의개복을 재촉하기에 남의 강토를 강점한 너희가 도적이지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호통치는 기품은 우뢰같은 목소리에 초범한 여력과 무서운 안광등이 상대의 근접을 두렵게 하는 무장풍이었다. 갖은 고초를 겪고 8개월후 해옥되었는데 후유증으로 다년간 신고타가 광복의 기쁨과 하청의 금일을 보지못한채 1927년 12월 15일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많은이의 애도를 더했다. 동족이던 당시 간수는 깊은 감명을 받고 사직 귀가하여 수도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묘는 계팔 백호등 계좌 선영하 송공산선생 묘갈찬이며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고 이동영 박사 찬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2007년 12월 일에 국가보훈처 마산지청 본 안내문은 기념사업회의 도움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