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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11 장연리 독립만세 시위
일제강점기 폭압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3.1독립선언서거 발표되자 목숨을 건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러 퍼져갔다. 청도군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이다.
1919년 3월 11일 장연리 길명의 농민 김집이는 이 마을 고성이씨 이원당 문중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었다. 의분을 참지못한 그는 같은 마일에 사는 노이만,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등과 함께 그날 밤 9시와 이튿날 밤 9시 두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 명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마을 골목을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길명마을의 독립운동가 이동기 선생 집 앞에서 다시금 모여 해산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 주재소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하고 주동 인물을 수소문하여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선생등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하였지만 모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김집이 선생과 노이만선생은 함께 도주하였는데 후일 노이만 선생만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 선생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이후 일제의 갖은 탄압으로 만세운동 관련 선생들의 가족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우리 청도군 3.1운동의 효시가 된 장연리 3월 11일 대한독립만세 시위 기념비 건립은 장연리 출향인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으고, 청도군청 청도군새마울회 관내 사회단체 초,중학교 총동창회 전국매전며 향우회 등에서도 성금과 후원을 하여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개인이 겪어야 할 가난신고를 무릅쓰고 독립만세운동에 나선 여덟 분의 독립운동가, 또 그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목놓아 불렀던 장연리 사람들의 이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며,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후손만대에 길이 전하고자 이렇게 높고 아름다운 비석을 세우는 바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