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77page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복지회관앞에 있다는 신영희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하지만 찾을수가 없었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작년에 철거가 되었다고한다. 원래 이 공터에 있었지만, 작년에 이 토지가 개인에게 불하되었고, 그후 토지주인이 철거를 했다고 한다. 1919년 4월 2일 저녁 신영희는 백곡면 대문리에서 이장 최태성을 비롯하여 장진호 등과 함께 주동이 되어 횃불을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갈월리 상양백리·하양백리·용진을 지나 석현리에 내려오니 참가한 군중이 35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 군중은 석현리에서 밤을 새우고 3일 아침에 석현리 이장 김봉경이 마련한 조반을 마치고, 신영희의 지휘 아래 진천 읍내 쪽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은 도망가던 면장 남계석을 붙잡아 태극기를 들려 앞장세우고, 백곡면 주재 일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으며, 소장이 시위를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계속 행진하여 사송리까지 왔다. 이 급보를 듣고 진천 주둔 헌병 8명이 달려와 사송리 모퉁이에서 시위 행진을 저지하기 위해 총포로 위협하였다. 이에 신영희가 달려나가 저지하는 헌병 1명과 격투가 벌어졌고, 다른 헌병들이 총대로 신영희의 팔을 후려쳐서 쓰러지게 하고는 시위 대열에 공포를 연발 쏘면서 행진을 저지하자 군중은 어쩔 수 없이 해산하였다. 함께 시위했던 정흥모·서상숙·전성호 등은 체포되어 3주간 구류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으나, 신영희는 1년 6개월 만에 풀려 나왔다. 신영희는 심한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50세를 일기로 1932년 세상을 떠났다.출처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77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