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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2025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운량 김태수(金泰洙)   종사 김익중(金翼中)    총독 백효인(白孝仁) 서석구(徐錫球)    감기 이영화(李英華) 전수용(全垂鏞)    좌익 김창복(金昌馥) 이석용(李錫庸)    우익 허경화(許景和)   선봉 김태원(金泰元)    포대 김기순(金基淳)   중군 이철형(李哲衡) 이들 중 상당한 수의 인물이 뒤에 개별 의진을 구 성하여 호남 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8월 11일, 동지 박용근(朴溶根)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 자 수백명의 자원병이 그를 따랐다. 그날 밤으로 그 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했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 하여 적에게 패하였다. 1907년 8월 26일 경남 하동의 화개에서 왜적 10 여 명을 잡아 죽였고, 이튿날 다시 칠불사(七佛寺)에 서 적 수 명을 죽였다. 9월 6일에는 구례의 연곡촌 에 서 적병 10여 명을 죽이니 나머지 적병은 모두 도망 쳤다. 9월 16일 고창 문수사에서 적 10여 명을 사상 시켰고, 9월 25일 무장 읍내에서 적병을 무찌르니 적은 모두 놀라 도망쳤다. 이후에도 고창·법성포 · 장 성 오동촌 · 백양사 · 함평 · 고부 등지에서 적병을 무찔 렀다. 1907년 12월 28일 행군하여 전북 순창 복흥에 이 르러 머물고는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과 서로 동 서로 나뉘었다. 기삼연은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불편하여 더 이상 종군할 수 없었다. 기삼연은 김용 구에게 후임을 맡기면서 “군중의 제반 일을 그대가 모두 맡아 신중히 처리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하고, 도장과 칼을 맡겼다. 김용구는 군병(軍 兵)을 대신 거느리고 행군하여 장성 조양리로 갔다. 한편 기삼연은 순창 흥복산 속에서 치료하며 재기 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적의 포위를 받아 결국 체포당해 이튿날 광주시 서천교에 서 적의 흉탄에 순국하였다. 그 뒤 김용구 의진은 김 호남 의병의 주요 전적지인 나주 용문산 김용구 의병장의 의병기록 『신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