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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2024년 5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5월의 독립운동가 되었고 독립운동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신흥무 관학교 시절부터 채찬을 지도했던 이시영은 『독립신 문』에 다음과 같은 애절한 추도사를 남겼다. “하늘이여 ! 하늘이여 ! 우리의 대업이 아직 성취되 지 못한 날에 우리 일꾼의 건장(健將)을 잃게 함은 누 구나 통석(痛惜)을 금치 않으리오.” 국토를 광복한 후에 가정을 갖겠다던 채찬은 칠십 노모를 남겨두고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김창균(1899-미상)의 독립운동은 대한독립단 가 입으로 시작되었다. 대한독립단은 전날의 의병장들 이 주도하여 1919년 4월 15일 남만주 서간도의 유 하현 삼원포에서 결성되었다. 김창균은 1922년 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가 평안북 도 강 계군 청풍동의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와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는 한편, 밀정 송의봉을 처단하였다. 1922년 8월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자 통의부 의용 군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3년 6월 강계군 어뢰면에 서 적 경찰대와 교전하고 강계·후창 등의 영림서를 습격하는 등 적 기관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24년 5월 19일 참의부 참의장 백광운의 명령에 따라 장창헌의 인솔 아래 압록강을 순시 중인 조선 총독 사이토 저격 투쟁에 참여하였다. 이후 1924년 7월 평북 위원군 화창면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무장 투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 각지를 전전하면서 군자 조선총독을 저격한 김창균과 이의준(일명 한권웅)의 예심 종결과 평양복심법원에서의 사형선고를 보도한 동아일보 신문기사(국가보 훈 부 제공). 「재등총독을 저격한 참의부원 예심종결, 압록강 하류에서 총독탄 배를 저격, 경호대와 오래동안 총화밧군 사건」 · 「총독 저 격 범 복심에도 사형, 평양복심에서 언도, 이의준 김창균 양씨」라고 보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