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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
대한독립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이 결연한 의지로 일어선 항일 운동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대한독립만세운동은 제주지역 관문인 조천지역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연일 신좌면(조천읍) 일대에서 일어난 구국투쟁 시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발단은 당시 조천 출신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에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 김장환(金章煥)은 3월 17일경 신좌면(新左面) 조천리 속칭 미밋동산(未毛峙)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3월 19일까지 14인의 거사 동지가 규합되었다. 김시범(金時範) 김시은(金時殷)외 12인은 유림간에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金時宇)의 기일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거사 준비는 김형배(金瑩培)가 대형태극기 4본의 제작을 담당하고 김시범(金時範) 김형배(金瑩培) 백응선(百膺善) 등은 소형태극기 3200여장 제작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계속적인 동지 규합 결과 14인 외 김유배(金濡培) 김순탁(金淳鐸) 문봉기(文奉祺) 김운배(金云培) 윤주진 고원륜 등도 가담하였다. 처음 3월 21일 아침 미밋동산에 14인 동지를 비롯 조천 인근 주민과 함덕, 신흥, 신촌 등지 서당생도(書堂生徒)등 150여명이 모였다. 14인 동지 중 김필원(金弼遠)은 더 많은 주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창호지에 혈서로 독립만세라 써 들고 만세를 외치며 조천주재소 서쪽에서 시위군중들이 웅집해 있는 미밋동산으로 행진하였다. 그러자 500여명의 주민이 그 뒤를 따라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아 세운 다음 김시범(金時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 김장환(金章煥)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일의 시위 행진은 미밋동산에서 조천 비석거리까지 이루어졌다. 2차 시위는 3월 22일 조천에서 백응선(百膺善) 박두규(朴斗圭) 김필원(金弼遠) 등이 주동하에 200여 명이 전날의 검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3차 시위는 3월 23일 백응선(百膺善) 김두배(金斗培) 이문천(李文千) 등이 주도하였다. 이문천(李文千)은 100여 명의 시위대를 선도하여 함덕리로 시위행진을 강행하였다. 함덕리에 이르러 이곳 청년과 주민이 합세하여 800여명으로 증가 만세 시위가 점차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4차 시위는 3월 24일(음력 2월 23일) 조천 오일장날이었다. 이날은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김연배(金年培)를 중심으로 한 장터에서 1,5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 시위 운동에서 14인을 비롯 모두 29명이 검거 기소되었다. 그 중 23명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검 제주지청에서 형을 선고받았다. 이 만세 시위 운동은 신촌, 함덕, 신흥 등의 인근 지역 뿐만 아니라 산남지역인 서귀포 삼매봉으로 확대되었다. 이 운동은 평화적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경의 강력한 탄압으로 부상자와 구속자가 발생하였다. 만세로(萬歲路)는 당시 조천 미밋동산(未毛峙)을 시발로 하여 조천 오일장터(지금의 비석거리), 신촌리(지금의 열녀문앞), 함덕리 시장(지금의 감영개 서쪽), 신흥리 등지에서 궐기한 수많은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이 흘러 넘치던 길이었다. 우리는 이 애국선열(愛國先烈)들의 구국투쟁 정신(精神)을 기념하고, 이 훌륭한 애국정신(愛國精神)을 후세에 계승하고자 이 표지석을 건립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