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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동년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이원식·윤세복·서상일·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 상해, 서백리아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정안립·박성태·박찬익·정신·김동삼·손일민·김좌진·서일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이범석·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 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문학빈·심용준·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이라 하여 이청천·김경천과 함께 독립군 인재의 삼천으로 불리던 지휘관이었으나 아깝게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