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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이 낳은 선비로 의기를 떨친 월봉 한기악 선생은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의 본보기였다 일생을 애국애족에 바친 선생은 1898년 1월 4일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흥호리 월봉 기슭에서 홍문관 교리 한정우 공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명문 청주한씨의 후예로 효종때 우의정에 오른 흥일공의 12세손이며 예판 돈원공의 증손인 월봉 선생은 원주 칠봉 문암서원에 모셔진 선조때 거유 구암 한백겸 공의 후손이기도 하다. 재덕이 겸하여 탁월한 선생은 다함께 명현 정암 조광조 공의 혈손으로 일찌기 홀로되신 조모와 자친의 슬하에서 자라며 명가의 귀공자로 남다른 효성을 다하였다. 병오 정미년간 의병봉기 때 왜의 병화로 앞마을이 회신되자 조모는 고택을 헐어 주민들에게 내주는 결단을 내리면서 가족의 상경을 주선하였다. 선생은 중앙학교와 보성전문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망국한을 달래다 못해 중원을 비롯하여 만주 연해주 일대를 유랑하며 구국단심을 불태우고 3.1운동 때에는 동경에서 활약하다가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법무위원으로 국권회복에 앞장섰다 다시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 동인으로 또 시대일보와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으로서 구국운동의 필봉을 종횡으로 휘두르며 한편 민족 합일전선인 신간회의 한 주역으로 민족해방과 사회평등의 구현에 분골쇄신하여왔다. 만년의 선생은 중앙학교에 돌아가 교육 대업에 봉직하던 중 1941년 6월 20일 불행이 향년 44세에 숙환으로 사세하니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풍현리에 안장하였다. 유인 의령남씨와의 슬하에 만춘 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