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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군장 신용희는 북문을 고수하였다. 일본군이 북문을 향해 총공격을 하자 후군장 신용희 의병진은 일본군을 대파하고 대포 1문을 빼앗아 진영으로 끌고 들어오니 의병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당황한 일본군은 대장 박진영과 밀통하여 귀화하면 경기도 광주 유수로 임명할 것이니 개화사회에서 복록을 함께 누리자 회유함으로 마음이 변한 박준영은 의병들에게 소를 잡아 술에 만취케하여 깊이 잠이 들게 하고 새벽에 성문을 열어주니 의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남한산성을 내어주고 말았다. 박준영의 음모에 속은 것을 안 의병들은 그 삼부자를 박살하고 성을 빠져 나와 뿔뿔이 흩어졌다. 공은 김하락 김태원 구연영 등과 함께 경북 안동 의성으로 내려가 분전고투 하였으나 김하락이 전사함에 경기 의병진은 흩어지고 국모시해 항전은 끝이 났다. 이후 을사조약이 있자 1906년 면암 최익현 의병진을 찾아 충남 홍성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 합류하여 담양 추월산과 순창전투에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면암 선생은 후일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고 의병진은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