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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분을 참지 못하여 일가 솔권하여 고국을 떠나 멀리 만주지역의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 남만주 무순현 동주천 소재 소사국민우급학교를 졸업했으며 북경의 중국의숙으로 부급하여 중국어와 영어를 전수하면서 항일정신을 장양하였다. 1934년 7월 항일결사인 의열단(단장 김시현)에 입단하였고 단재 신채호 선생이 제창하신 조선혁명선언에 호응하여 독립군 양성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9년 1월 남경군관학교설립 및 독립군양성사건으로 장기형무소에서 5년의 옥고를 겪은 김시현 동징와 재회하여 박시목 권애라 김봉년 권혁준 동지와 함께 중경의 항일정부지역으로 망명하였다. 1940년 6월 임시정부 김구주석과 김규식박사 및 임정요인과의 회합에서 임시정부의 국제적지위의 합법적 공식승인에는 무장독립군 1개사단 병력편성이 시급한 요건으로 지적되자 선생은 영어의 능숙한 구사로 중국방면연합군최고사령관 “위드마이어” 장군과 면담하여 무기원조의 승인을 받아내었고 독립군 충원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1년 9월 일본군점령지구인 봉천에 잠입하여 간도성과 길림반석등지로 활동범위를 확장하면서 독립군병력증강지하운동을 전개하던 중 주구의 밀고로 일경에 피체되었다. 비밀감옥에서 1년 이상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재만 105인 지하 항일결사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신경(장춘) 고등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았다. 두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 투옥되었으니 그 정황에 뉘라서 절치하지 않으리오.1945년 8월 13일 패망이 임박하자 단말마적광란에 빠진 일본관동군헌병대는 선생을 장춘교외로 연행하여 불법적인 총살형을 감행하고 말았다. 오호 슬프도다. 38세의 젊은 목숨을 조국광복의 제단에 바쳐 순국의 열혈을 만주 광야에 뿌렸건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까지 유해봉안이 한중양국의 국교단절기와 중국문화대혁명으로 모든 문건이 소실되어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비분 통탄을 무엇에 비하리오. 1977년도에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니 선생의 애국일념의 위대한 행적은 조국의 역사와 더불어 영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