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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5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무장 항일투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독립 군 여러 계파의 통합과 그 분열을 막는데 앞장 선 점 이다. 일송에게 국권회복의 지름길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 독립운동 계파의 통합만이 지상 명제였다. 일송은 언제나 그 통합 운동에 선봉장이었다. 1931 년 9월 이른 바 ‘만주사변(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함)’이 일어나 일본군이 중국 동북(만주) 지역으로 침 략해 오자, 길림성 독군(督軍) 희흡(熙洽)으로부터 일 송에게 한중 연합군 설치를 추진하자는 제의가 왔 다. 이에 일송은 동지들과 길림으로 가서 한중 합작 으로 항일연합전선을 펼 것을 의논하고 하얼빈으로 돌아오던 중,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 에 체포되었다. 일제 관헌은 일송을 체포하는 데 혈 안이 되어 사방에 거미줄처럼 밀정들을 풀어뒀던 것 이다. 만해 한용운이 장사를 치러주다 일본 당국은 하얼빈 일본영사관 지하 감방에서 일 송에게 갖은 고문과 악형을 서슴지 않았다. 일송은 갖은 고문에도 함께 투쟁한 동지의 이름을 결코 팔 지 않았다. 일 송은 국내로 압 송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10년 형의 판결을 받 고 서울 마포 형무소로 이감 되었다. 언제나 독립 전선에서 선봉장으로 몸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당시 나이는 이미 중로를 넘겼고, 일제의 갖은 고 문과 좌절된 항일운동에 대한 울분으로 건강이 날로 악화돼 감옥생활 6년 되던 해인 1937년 4월 13일(음 력 3월 3일)에 옥사했다. 그때 가족은 모두 만주에 있었고, 일제의 야만성이 극도에 이른 때라 친지 중 에 누구 한 사람 나서서 시신을 염습할 이가 없었다 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만해 한용운이 나섰다. 당시 로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죽음을 무릅쓸 만한 용기였 다. 만해는 일송의 시신을 수습하여 당신이 거처했 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옮겨 장사를 치렀다. 이 는 일찍이 만해가 만주 망명 시절에 일송을 만나 뵙 고 받은 그 인품에 대한 감명과 독립투사에 대한 의 리 때문이었으리라. “김 선생이시여! 이 산하 어디 가서 당신만한 큰 인 물을 찾겠습니까? 김 동지여!” “이제 이 나라에는 인물이 없게 되었소. 일송 동지 만 한 인물이 어디 있겠소.” 일송의 시신을 껴안은 만해의 절규였다. 그때 일 송 선생 장례식에 조문한 인사로는 정인보 · 김병 답사단을 안내했던 현지 (요녕성 신빈현) 조선민족사학회 부이사장 조문기 교수 필자의 주선으로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 씨와 『한용운 평전』을 쓴 고은 시인(왼쪽)이 덕수궁 대한 문 앞에서 만났다. ‘백서농장’이 있었던 유하현 쏘베차 산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