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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5년 9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에 세워진 의병대장 민긍호 전적비 일대는 문자 그 대로 ‘적막강산’으로 뻐꾸기만 구성지게 노래를 부 르며, 제 벗인 양 나를 반기는 듯 했다. 그날 전적비 앞 제단에는 월현2리 주민들이 그 전날 현충일을 맞 아 헌화한 꽃바구니가 놓여 있기에 나그네의 마음을 한결 흐뭇하게 했다. 나는 제단 앞에서 깊이 묵념을 드린 뒤, 전적비 뒷면의 비문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 었다. 민긍호 대장 전적비문 관동창의 대장 민긍호(閔肯鎬)는 여흥 민씨 민치봉 과 원주 원씨 사이에 18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민 긍호는 1897년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하여 1900년 에는 원주 진위대 고성분견대 정교(正校, 현 상사)로, 1901년에는 특무정교로 근무하였으며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까 지 원주 진위대에서 근무에 충실하였다. … 민긍호 의병대는 강원도 · 충청도 ·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秊), 윤기영(尹起榮) 등을 비롯한 여러 의 병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약 1천 여 명을 지휘 하여 횡성 · 충주 · 원주 · 여주 · 고성 등의 지역에서 100 여 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민 의병대장은 1907년 관동창의 대장이 되어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 탈환작전에도 참가, 삼산 리전투와 처현동전투, 죽전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 다. 1907년 겨울 일본군은 의병대 토벌을 부쩍 강 화하였다. 이에 민긍호 의병대장은 의병대의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50~60명 씩 분산을 시켜 일본군 공 격에 대항하였다. 1908년 2월 27일 오전 11시, 강림 의 박달치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뒤 월현리 10리 지 점에 있는 궐덕리(현, 고비덕)에서 숙영하였다. 일 제 군경은 이 정보를 탐지, 그 일대를 포위 공격하였다. 민긍호 의병대는 그들과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3시 간이 지난 뒤부터는 탄환이 떨어져 그때부터 전세가 갑자기 기울어졌다. 그러자 민긍호 대장은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경에게 스스로 체포돼 원주 일 본군 수비대로 압송되는 도중, 강림5리 창말 마을에 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날 밤 의병대 60여 명 이 민 대장을 구출하기 위해서 박달치 동북방으로부 터 일본군경을 습격한 뒤, “민긍호 대장님은 어디 있 는지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라” 크게 외쳤다. 이 소리 를 듣고 민 대장이 포박된 채 탈출을 시도하자 다급 해진 일본군은 그 자리에게 민 대장을 사살하였다. 민긍호 의병대장은 1908년 2월 29일 43세의 나이 로 장렬히 순국한 것이다. … [찬(撰) 박찬언 제자(題 字) 이병렬 장군] 내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지라도 민긍호 의병대장은 생전에 강원도 관찰사가 귀순 을 권유하자 다음과 같이 통박하며 일본군경과 맞섰 다고 한다.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도 왜(倭) 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속에 묻히지 못하 고 내 영혼이 망망대해를 떠돌지라도, 조금도 후회 하지 않는다.” 나는 민긍호 의병장 전적비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 는데 녹음이 깃든 주천강 언저리가 고즈넉하고 더없 이 아름다웠다. 마침 다리 건너 마을 들머리의 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