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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25년 3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하여 20년 서울에서 근무했는데, 당신은 집안 종손 에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난바, 부모를 일찍 여읜 바 람에 아내가 혼자 고향에서 시동생 시누이를 돌보고 당신 자녀까지 길렀다고 한다. 더 이상 아내의 수고를 볼 수가 없어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 때 이기수 부시장을 찾아가서 고향으로 돌 아가겠다고 전근을 신청했다. 그러자 남들은 서울로 오지 못해 안달복달인데 다시 더 생각해 보라고 만 류했다. 하지만 끝내 그 뜻을 굽히지 않자 영광군청 으로 발령 내줘 총무계장을 거쳐 대마면장으로 36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단다. 당신은 ‘충효보국(忠孝報國)’이 몸에 밴 모범 인생 으로. 가훈이 “선조의 유지를 받들고 정직하게 살 자”라고 소개했다. 그날 밤이 늦도록 이런저런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는 잠자리가 마땅치 않아 광주로 나왔다. 단장의 영산강 포구 이튿날 귀로에 오용진 선생의 안내로 호남의병 전 적지 순례에서 빠트린 중요 전적지를 몇 곳 더듬 어 주었다. 먼저 나주 영산강 포구로 갔다. 구한말에 일 제가 호남의병을 체포한 뒤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인 물은 대부분 대구감옥소로 보냈는데, 그 시절에는 교통이 불편해 바로 이 포구에서 배를 태워 목포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한 다음, 육로로 대구에 갔다. 그 탓에 영산강 포구는 일본 관헌들에게 붙잡힌 의병들 과 그들 가족들과 생이별했던 단장(斷腸, 창자를 끊 음)의 아픔이 새겨지고 피눈물이 뿌려진 눈물의 포 구였다고 오 부회장은 말했다. 당신 할아버지 오성술 의병장도 오랏줄에 묶인 채 이 영산강 포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때 나루 터에는 부인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 나와 부자의 첫 상봉이자 생이별을 했던 곳이라며 그 사 연을 전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거기서 다시 북상하여 구진포에서 잠시 머물고는 의병 전적지로 유명한 나주 문평의 용문산을 바라보 며 달리다가 함평의 고막포 전적지에 이르렀다. 무 심한 세월은 옛 격전지 모습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의병들이 끌려갔던 영산강 포구  김용구 의병장 후손 김근순 전 대마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