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page

74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단체로 흥업단(興業團)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 동했다. 1922년 화전현으로 이주했을 때 김만수와 알게 되어 교류했는데, 1923년 북만주 취원창(聚源 昶)에 가 있다가 1924년 3월 하얼빈의 부가전(傅家 甸)으로 옮겨가 있던 중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은 밤늦도록 깊은 얘기를 나누었고, 유기동도 흔쾌히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불행히 도 은신처가 탄로 나버렸고, 일본영사관의 압력과 재촉을 물리치지 못한 중국 지방정부 외교 · 군사 · 경 무 당국자들의 진압으로 세 사람은 군경의 집중공격 을 받아 순국하고 말았다. 3의사의 시신은 일단 경찰이 수습한 다음 하얼빈 중구(中區) 십자회(十字會)에서 염하고 한인 공동묘 지에 매장해 주었다. 묘소는 이후에도 참배객들로 붐볐고, 모두가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그 장렬함을 칭송했다고 한다. 하얼빈 의거의 반향과 의의 이 사건은 하얼빈 현지와 국내 신문에서 크게 보 도되었다. 원흉을 권총 한 방으로 응징·처단했다는 점에서 꼭 25년 전 같은 지역에서 벌어졌던 안중근 의거를 방불케 하는 사건이었다. 하얼빈의 사회단체들은 일본 측에 대한 비난을 멈 추지 않았다. 엄연히 중국 경내인 곳에서 일본영사 관이 ‘국사범(國事犯)’인 한인 독립운동자를 ‘토비(土 匪)’로 모함하고 멋대로 체포해 가려다 상황이 불리 하니 중국 군경이 대신 진압하도록 사주한 것으로, 이는 국제공법에 위배되며 주권침해까지 더해진 행 동으로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하 얼빈교섭서(交涉署)가 일본영사관에 엄중히 항의할 것을 단체연합회 명의로 요구하였다. 이에 길림성장 은 진수사(鎭守使)를 질책하며, “죄명이 분명치 않은 데도 외국인이 요청한다고 함부로 군사를 내어 영내 (領內) 사람을 대신 체포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다. 서로군정서 의용대 재무부 발행 군자금 영수증(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