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page

순국 스크랩 • 서울의 3·1운동 73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 의 하에서 상하. 귀천. 남녀. 존비(尊卑) 할 것 없이 꼭 꼭 맞절을 하고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서 모 두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 고 저녁이고 도인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홍종식이 이야기한 농민군의 첫째 행동은 1919년 4월 11일 3·1운동 과정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 장의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 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는 규정과 별 다름이 없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서울 진격을 목표로 삼았으 나, 서울에서 직접 활동하지는 않았다.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농민군 최고 지도자들인 전봉 준(全琫準), 손화중(孫化中), 김덕명(金德明), 최경선 (崔景善), 성두환(成斗煥)이 서울 전옥서(典獄署)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018년 4월 24일 서울 지하철 1호 선 종각역 영풍문고 앞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건립 되었다. 그 앞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되새기고 서울의 3·1운동 역사기행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에서 ‘독립선언서’는 운동의 당위 성을 드러내고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중요한 매개물 이었다. 1919년 2월 25일 무렵 민족대표 33인을 천 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으로 정했다. 그때 까지도 누가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릴지는 정해 지지 않았다. 내란죄로 몰려 중형은 물론 사형도 각 오해야 할 선택이었다. 27일 오후에서야 33인의 명 단이 확정되었다. 2월 27일 밤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조계사 후문쪽 수송공원 공터에 ‘보성사터’, ‘숙명여 학교 옛터’, ‘신흥대학 터’ 표지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옆에는 보성사 사장 이종일 동상도 있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경운동 이종일 사장 사택으로 옮겼고, 28일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의 조직망을 통해 서울과 전국으로 전달되었다. 이 종일 사택은 수운회관 앞 방정환의 어린이 운동 기 념비인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가 서 있는 자리에 있었다. 옆에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은 1918년에 세울 것을 발의하여 3·1운동 후인 1921년에 완공하 였다. 교당을 건립하겠다고 모금한 성금의 상당액을 3·1운동과 이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일 전, 2월 27일 독립선언서 인쇄와 28일 배포까지는 역사가 좌우될 정도로 초긴장 상 태였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2월 28일 밤, 민족 대표 33인 중 23인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 집에 모여 파고다공원 대신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따로 독 립선언식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3월 1일 태화관에 서 독립선언식을 가진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 경 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이를 알렸고, 결국 남산 북 쪽 자락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민족대표 들은 목숨을 걸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1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으나, 현장에서 앞장서 민중 을 지도하는 노릇까지 담당하지는 못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 팔각정 앞에 2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해주에서 활동하다 참가한 정재용(1886년 해주태 생, 만 33세)이 주머니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 했다. 학생들이 ‘조선 독립 만세’를 삼창하고 공원을 벗어나 행진하는 과정에 시위대가 금세 수천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