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page
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㉒ 73 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 고 이 기회를 틈타서 일 제와 독립전쟁을 정면으 로 펼치려고 독립군 양성 소로 백서농장을 세웠다. 하지만 중 · 일전쟁의 불발 로 수포로 돌아가자 후일 을 대비했다. 이 무렵 일 송 선생은 대종교에 입교 하였다. 이는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의 함양 때문이었다. 1919년 2월 말에서 3월 초에 일송은 만주와 러시 아 등지에 망명하고 있던 지사들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김교헌(金敎獻) · 조용은(趙鏞殷 : 조소앙) · 김 규식(金奎植) · 이상룡 · 여준 · 김좌진 · 이동녕 등 39명이 연서하여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 독립선언서]’ 를 발표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가 비폭력적 독립운 동을 지향한데 견주어 이 독립선언서에서는 “…육탄 혈투(肉彈血鬪)하여 독립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무 장 독립투쟁의 의지를 보인 점이 돋보인다. 이 선언 서로 만주·러시아 일대의 동포들에게 독립심을 한결 드높였다. 이후 일송은 서로군정서 참모장(1919년), 대한통 의부 총장(1922년), 상하이 국민대표회 의장(1923 년), 전만통일의회 의장(1924년), 정의부 참모장과 대표(1925~26년) 등 독립운동의 요직을 두루 맡았 다. 서로군정서 참모장 당시 무장투쟁에 대해 안양 교도소에 보관된 일제의 기록을 보면, 일송의 지령 으로 국경을 넘어 일본 경찰과 싸워 체포된 것만 7건 19명에 이르며, 13명의 일경을 사살했다고 한다. 정 의부 참모장 때인 1925년 3월부터 국내 진공 을 개 시하여 3월 19일에는 평안북도 초산의 일제 추목주 재소와 옹암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일경 5명을 사살 하고, 무기 다수를 노획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 다고 한다. 그해 7월 4일에는 7명의 독립군이 평민 으로 가장하여 평안북도 철산의 차련관주재소를 습 격해서 경찰 4명을 사살하고 무기 전부를 빼앗았다. 또, 8월 18일에는 벽동 경찰의 여해출장소를 습격해 서 일경 3명을 사살하고 출장소를 불태웠으며 무기 전부를 탈취했다. 이 모든 무장투쟁을 진두지휘하면 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일송은 ‘남만(南滿)의 맹호’라 는 별칭을 얻었다. 일송은 1926년에는 2월과 8월 두 차례나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취임하지 않았다. 1928 년에는 길림(吉林)에서 정의부 대표로 김좌진 · 이청 천 등과 함께 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의 삼부 통합회 의 진행을 맡았고, 그 해 12월에는 혁신회의 의장을, 1928년 5월에는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에 착수하여 수석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송의 위대한 점은 김동삼 가족 사진. 앞줄 가운데가 부인 박순부 여사(경상 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국립서울현충원 임정 묘역에 있는 김동삼 선생 묘(왼쪽)와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