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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⑮ 73 예산의 면암 묘소에 들러 깊이 절을 한 다음,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부지런히 영광으로 달려갔다. 낮이 긴 봄날 탓으로 다행히 해는 지지 않았다. 김용구 · 김기봉 부자 의병장 후손 김근순(전 대마 면장)씨가 곧장 당신 집으로 안내하려는 것을 사진 촬영 때문에 우선 산소부터 가자고 하였더니 당신 집에서 부르면 대답할 거리인 앞산에 증조부 김용 구, 조부 김기봉 부자 의병장을 위 아래로 모셔두었 다고 했다. 먼저 그곳을 들리자 최근 묘역을 크게 손 본 듯, 석물(石物)에는 풍상의 자취가 그리 보이지 않 았다. 오 부회장과 함께 두 분 묘소에 큰 절을 올린 뒤, 후손 김근순 면장 댁으로 가서 건넌방에서 대담 을 나눴다. 후손 김근순 면장은 증조할아버지 김용구 의병장, 할아버지 김기봉의 의병장의 충절보다 당신 할머니 청송 심씨의 효열부(孝烈, 효성과 절개를 지킨 열부) 를 더 높이 칭송했다. “남자들은 나라를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게 의롭고  당연한 일일 테지만, 꽃다운 20세에 청상(靑孀, 젊은  과부)이 되어 온갖 고난을 다 이기고, 송죽(松竹 ) 같 은 절개를 지키며, 시아버님이 남기신 의소일기(義 所日記)인 『신담록(薪膽錄)』을 평생 동안 가슴에 품고  모진 일제 강점기를 넘겨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그 정 성은 부덕(婦德)의 한 본보기입니다.” 그 무렵 호남 의병전적지 답삿길에 여러 후손들을 만나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면 순국한 의병장 보다 남은 가족들의 삶이 더 고달팠던 가시밭길이었 다. 한 의병장 후손은 ‘꿀꿀’거리는 돼지우리 옆에서 짐승(같은 돼지)처럼 울면서 살았다는 뼈아픈 이야 기도 하였다. 김근순 후손은 증조할아버지(김용구 의병장), 할아 버지(김기봉 의병장)뿐 아니라 당신 아버지(김두호) 도 일제 강점기 6 · 10 만세를 주동한 삼대 독립투사 로, 일제에게 밉보여 당신 집에도 불을 질러 여러 곳 을 전전하였다. 하지만 그 고난이 어찌 우리 집만 그 랬겠느냐고, 당신 집안 고생 고생한 얘기는 줄였다. 그는 고등학교조차도 어렵게 나온 뒤, 대학 진학 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출발  김용구 의병장 초상화(김근순 제공)   김용구 · 김기봉 부자 의병장이 위 아래로 안장돼 있다(이하 현장 사 진은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