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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선생 73 부모와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봉천성 동남쪽 통화 현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3 · 1운동 발발 후 집을 떠나 북만주로 가서 중동선(中東線) 철로 일대를 돌아보고 길림성의 왕청현과 영안현 사이에 머물렀다. 이곳은 북로군정서의 근거지 부근으로, 그도 ‘군정서 대원’ 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상룡이 쓴 전기문에는 최병호가 김만수와 함께 남만주의 ‘서로군정서’로 들어와 헌병대에 편입했었 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그가 이홍래와 동행했고 더 욱이 서로군정서 구역도 아닌 북만주의 하얼빈으로 간 점으로 보면, 적어도 1924년 당시의 두 사람은 이 홍래 주도의 청년모험대(‘건국청년모험단’으로 일컫 기도 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재건된 북로군정서 로 소속이 바뀌었거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룡의 전기문에서 언급된 ‘북진군 응 소(應召)’가 1921년 독립군단의 러시아행 대이동 때 서로군정서 부대도 이청천(李靑天)의 지휘 하에 호응 북행하여 이동 대오에 합류했던 사실을 압축해 표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이 하얼빈으로 들어간 때는 그곳 총영 사관의 고등경찰 간부 쿠니요시와 형사부장 마쓰 시마(松島)가 장춘(長春)과 하얼빈 일대의 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함부로 해친다고 악명이 높던 1923년 음력 12월 초(양력으로는 1924년 1월 초순) 이었다. 그들은 하얼빈에 은신해 있으면서 “적견배 (敵犬輩)와 간부(奸富, 군자금 의연에 매우 비협조적 인 부자들), 적경(敵警)을 암살하며 적의 소유건물 등 을 파괴하려는 계획” 아래 거사 기회를 엿보던 중의 어느 봄날, 예전의 동지 유기동과 우연히 마주쳤다. 1891년생(추정)인 유기동 또한 김만수처럼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찍부터 만주로 건너왔다. 1920년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대종교 계통의 독립운동 경북 안동시 풍산읍 오미마을 김만수 선생 생가터에 세워진 ‘순국선열 김만수  의사 생가지’ 표지석(출처 디지털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