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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생각나는 것은 천하제일의 음치인 내가 부스 안에서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했 다는 것이다. 기억력의 한계로 인해 당시 피디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사실 기억이 나긴 한다), 참 해도 너무했다. 멘트 중간에 노래를 넣었으니. 뭐 그리 긴 가사는 아니었고 동요정도의 노래였다 하지만 나의 음치 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 치 못할 일이었다. 당시 오투위(오선지해방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나는 뻔뻔하게 그 멘트를소화해냈다. 입학 철이 되면 학과별 경쟁률을 시간별로 방송으로 내보내고, 철마다 외부 스피 커를 보수한다고 사다리를 올라갔던 일 등등. 군 제대 후 복학을 하면서 당시 방송국 외부 소식지 역할을 하던‘월보’를 제작하고 발송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이런 소소 한 일들이야 말하자면 끝도 없이 풀어져 나올 것이고 또 대개는 모두가 비슷하게 경험 했을법한일들이겠다. 하지만 기억속의 일들이 항상 좋았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애써 잊으려 노력한 일 도 있을 것이고,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그런 아픈 기억도 존재할 것이다. 다양한 사람이 서로 다른 각가지 생각들로 서로의 주장을 해서 그로 인한 의견 충돌은 언제 어디에서나발생하는게당연한것이리라부끄럽게위로해본다. 방송을 하기 위해 모인 우리들이지만 방송과 관련된 일보다는 그 외적인 일들이 기억에더많이남는다고하면본업에충실하지못했다는심적인물증일까? 해마다여 름과 겨울로 세미나를 가고, 철마다 MT를 갔기에 같이한 시간만큼 그 추억의 깊이도 깊은것은당연하지않을까. 1학년 겨울방학 때 근 한 달을제주도에서 보내고 방송국 겨울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제주도에서설악산까지찾아간일은지금생각해봐도아득한일이다. 제주도에서 배편을 구하지 못해 하루를 허비한 덕에 서울에서 출발하는 일정에 맞출 수가 없었다. 지금에야휴대전화가있지만휴대전화는커녕당시에는삐삐도없던시절이라숙소에 대한사전정보도없이세미나장소로합류한다는것은어찌보면무모한일이었다. 당연히 가야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속초행 버스를 탔고, 설악동 1지구, 2지구, 3지 기별 Essay | 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