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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을 벌였다. 이에 앞서 그는 서울 경신교 재학 중 은사 김규식 김창환 양선생의 출국을 인해 신흥군관학교에 연락을 가졌더니 이에 이르러 그는 청년동지들을 그리로 인도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고 격문을 날려 한인왜관의 퇴직을 종용하고 국내외 연락의 통신망을 만드는 등 혼신의 정력을 기울였다. 적은 3년형 또는 5년형의 전후이차 궐석판결을 내리고 혈안의 수사를 하였으나 그는 일본과 청도를 거쳐 북경으로 탈출하여 거기서 교민단 대표로써 상해 임정의 최고정치회의에 참석한 최연소자로 김규식 안창호 여운형 제씨를 좇아 활동하고 다시 김원봉 이종암 등과 의렬단을 조직하여 비상항쟁을 하였으나 동지들이 자금 관계로 공산당의 지휘를 우러르게 되자 그들과 결별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목회로서 각 교회의 신건 증축에 전력하는 한편 대구 장로교 신학교장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계성 중 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계명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여 종교를 통한 민족 자유사상의 배양 및 교육에 의한 민족 실력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광복 후 6.25 사변등에 수만의 이재동포를 구출하는 등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항쟁과 구호의 연속으로서 거룩한 주의 사도로서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완전 발휘하였다. 이에 4296년 9월 17일 그의 별세 후 향도 인사들은 그의 정신을 먼 장래에 끼치려고 기념사업회를 이루어 이제 그 비문을 불초에게 부탁하매 불초 감히 사거하지 못하여 삼가 그 사적을 위에 베풀고 이어 명사를 바치노니 아아! 아버지 하느님! 임의 아들 이천만 임의 베푸신 자유 평등 넓은 사랑 누리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