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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25년 10월 순국 Focus   역사의 시선으로 순국스크랩 1999년 8월 5일 봉오동 일대 및 용정 윤동주 생가 답사에 이어 8월 8일까지 백두산 일대 및 청산리 전 적지, 지린성(吉林省) 일대의 항일 유적지를 거친 후, 8월 8일 지린성 유하현(柳河縣)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곳에는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세운 ‘백서농장(白西農 庄)’ 독립군 양성소가 자리 잡고 있는 바, 안내자 김 중생 선생은 백서농장은 오지 중의 오지라면서 고개 를 흔들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가 세운 유적지라 서 겸손으로 피한 줄 알았다. 일송 김동삼은 어떤 분인가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의 유림 집안에서 태 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이었다. 뒷날 만주로 망명하여 동북삼성의 독립 운동단체와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대동단결시키기 위 해 당신 이름까지 ‘동삼(東三)’으로 고쳤다. 일송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후예로 한학 수학에 전 념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청년기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혁신 유학자로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 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로 체결하자 일송은 비분강개, 안동지방 보수 유림 의 완고한 풍습을 혁파하고 자주 독립사상을 고취 하 기 위해 신서적도 많이 읽고 여러 개화 사상가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29세가 되던 1907년, 이상룡 · 유인 식 등과 같이 사립 협동학교를 설립, 교감으로 취임 하여 청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쳤다. 협동학교 교직 원과 학생들이 단발을 하자 보수 유림의 거센 반발 에 부딪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극복 하여 후일 3 · 1운동에는 협동학교가 안동 의거의 중 심이 되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합방되자 일송은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이듬해 협동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 한 후, 신민회의 해외 독립기지 건설에 동참하여 뜻 있는 동지들을 인솔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 정착한 일송은 우선 민단 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 에서 조직과 선전을 맡았다. 일송은 매일 일백 여 리 나 되는 벌판을 뛰어다니면서 북간도 서간도 각지에 흩어진 동포를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에 협력을 호 소하였다. 당신의 차림은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메고 한 푼 짜리 만주 전병으로 요기하면서 겨울에도 ‘싸 이헤’라는 만주인 여름신발을 신고 강행군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송은 중 · 일 전 내앞마을 김동삼 생가.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지금은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의성 김씨 후손이 살고 있다(서울신문 제공). 체포된 김동삼이 갇혀있었던 하얼빈 일본영사관의 1999년 여름  답 사 당시의 모습(이하 현장 사진은 필자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