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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24년 4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4월의 독립운동가 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세 청년이 한국독립 군임을 확실히 인지한 장젠둥은 “그 말과 같다면 여 러분은 다 국사범이라, 조용히 잡혀주면 우리가 국 사범으로 대우할 것이요, 결코 일본에 인도하지 않 겠으니, 어떠한가?”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3인은 “여 러분은 그냥 물러가고 부디 우리의 생각을 받아들여 달라”고 대답하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이렇게 대화가 끝나가던 참에 쿠니요시가 갑자기 중국경찰의 전등을 빼앗아 들고 권총을 겨누며 집안 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안에서 즉각 권총이 발사되 었고, 가슴을 관통당한 쿠니요시가 거꾸러져 즉사했 다. 몹시 당황한 일본 총영사는 1인당 현상금 3백 원 을 내걸고 중국 군경에게 체포를 강력히 요구했다. 진수사도 그와 같이 독려하므로 철통같은 포위망 속 에서 한밤중에도 총탄 5백여 발이 난사되었다. 그렇 지만 기와와 벽이 워낙 견고하여 바로 무너지진 않 았고, 안에서도 간간이 권총 응사가 있었다. 그런 대치상태와 공방전이 날이 밝은 후에도 계속되 다가 어느 때부터 집안이 조용해진 듯했다. 이에 중국 경찰이 얼른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냈 다. 그 사이로 수류탄 대여섯 개를 던져넣어 폭발시킴 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그러자 마침내 외벽이 무너지고 경찰이 한꺼번에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청년 3인 모두 바닥에 엎어진 자 세로 죽어있었다. 처참한 형상의 시신 주위로 유혈 이 낭자했고, 권총 2정에 실탄 3발, 수첩 1권이 남아 있었다. 3인 모두 가슴 한가운데에 총탄 자국이 있 어 자결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장렬한 전사로 순 국한 것이었다. 이때가 4월 9일 오후 2시경이었다 는 후일의 명시적 기록이 하나 있는 반면에, 조선총 독부 보도자료와 현지취재 내용이 섞였을 바 당시의 국내신문 기사들에서는 하나같이 4월 7일 자정부터 8일 낮 동안의 일이었던 것처럼 보도되었다. ② 3의사의 신원과 생전 활동행보 시신 셋 중의 한 사람은 왼쪽 팔뚝과 다리에 먹으 로 이름과 생년이 새겨져 있었다. 31세, ‘김만수(金萬 秀)’였다. 다른 두 사람은 ‘유기동(柳基東)’과 ‘왕국심 (王國深)’이라는 명함을 각자 지니고 있었다. 김만수는 1892년 음력 12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고, 1913년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이 동했다. 그 후 여러 곳을 돌아보며 다니다 1918년 안 동 출신 독립지사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주도 로 길림성 남부의 화전현(樺甸縣)에 설립된 길남장 (吉南庄)으로 들어갔다. 길남장은 20세 이상의 장정 을 모집해 농병(農兵)으로 삼아서 반나절은 농사짓고 반나절은 군사훈련을 받게끔 하는 둔전 형태의 병영 이었다. 이상룡은 그 시절의 김만수를 “키는 작으나 꼼꼼 하고 날쌨으며 인내심 많은 이”로 기억했다. 또한 병 서를 좀 읽었다고 아는 체하기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잘 죽일 수 있어야 진짜 군인이라고 강조한 점 도 특별히 기억되었다. 입소 몇 달 후에 길남장을 떠 나갔던 김만수는 1920년 화전현에 본부를 두고 임 시정부 승인 하의 무장단체가 된 서로군정서로 찾아 가 합류했다. 그리고는 주민 상대의 군자금 징수 활 동에 종사하다 1922년 헌병대가 신설되니 그 대원 으로 충원되었다. 왕국심의 본명은 사후 확인되기로 최병호(崔炳鎬) 였다. 1903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