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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처사의 휘는 신혁이고 자는 명중이다. 공은 고종 기묘년에 밀양 청운리에서 쌍둥이 아우로 태어났다. (1879~1966). 형은 퇴산처사이며 학문과 덕행이 높아 내문사가로 불리운다. 약관의 나이에 형제가 함께 소눌선생이 문하에서 수학하여 절사지의를 밝히는 공부에 나아갔다. 이는 위기지학의 본분사이다. 1919년 3월 파리장서 유림독립운동에 조선의 올곧은 선비 137인이 서명하였는데, 우산도 소내 선생과 함께 서명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 창녕 장날에 수천 군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4월 12일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해방까지 항일운동을 하였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실로 애국지사의 삶이었던 것이다. 아! 공은 순박한 자품을 타고나서 성현의 학문을 실천하였으니 언어는 경전에 부합하지 아니하면 하지 않았고, 일이 의리에 합치되지 않으면 행하지 않았다. 공이 만년에 약언하여 "배움이란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천부의 성품을 따를 뿐이다" 하였는데 전현의 도에 어긋나지 아니한다. 공의 학통연원은 퇴계 한강 미수 성호 순암 하로 성재 소내로 이어지는 조선유학의 큰 흐름을 받은 것이다. 공이 고연덕곡에 서당을 지어 몸을 숨기고 높은 관과 넓은 띠를 두르고 오로지 구방심에 성성자계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구방심에 뜻이 있었기에 평생토록 저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