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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임형순 순국열사 추모비
임공의 휘는 형순이고 자는 행원이며 본관은 풍천이다. 문과급제하고 가선대부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휘 내신 호 어음공의 후손으로 임진왜란시 선무훈에 오른 승정원 좌승지이신 위가 12대조이고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이신 수호가 조부이고 고는 생원 규재이며 비는 전주유씨이다. 공은 1891년 고종 신미 5월 11일에 여주군 흥천면 내사리에서 2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고 학문에 전념하니 청년 유생으로 이름이 났으나 공명에 뜻이 없고 가도만을 착실히 지키는 청년 처사라고까지 일컬었다. 또한 집 한 채를 뛰어넘을 정도로 날렵한 용맹이 있으며 상항 언행이 신중하고 품성이 강직하며 애국충절에 불타는 의리의 청년 유생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간교한 침략행위가 노골화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노일전쟁으로 러시아 세력을 추출한 후 소위 을사조약을 빙자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의 불법적임을 해아특사로 하여금 만국공의에 호소한 고종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국군을 해산하는 등 간악한 일본의 만행은 천인을 공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 땅에 배달민족의 분노는 요원한 불길되여 을미의병을 위시하여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우리강토 방방곡곡에서 창의의 불길이 하늘을 뒤덮고 왜적을 저주하는 함성이 강산을 진동시켰다. 이를 바라보는 공은 향토에서 학문만 연수하고 평안히 있을 수 없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1907년 7월에 이천창의를 선포하니 당일로 300여 명이 모여들어 창의소장이 되니 여주 양평 등지의 의병과 연계하여 용문산에 본영을 두고 대장에 이인영, 우군장에 박관일, 좌군장에 정대일 좌군부장에 임형순이 되어 이천 여주 광주 양평 음죽 지평 죽산 양지 용인 안성 등지에서 일군과 십 수차 전투를 하였다. 한때는 원주에서 오는 민긍호 부하와 함께 합세하여 여주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충주에서 오는 이강년 부하와도 합세하여 음죽 죽산 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