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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스크랩 • 구국 의병항쟁 열전 - 거룩한 구국항쟁의 현장을 가다 ㉒ 71 했다. 어떤 이는 세 계정세를 모르는, 바 위에 계란을 던지 는 무모한 투쟁이었 다고 말할지 모르겠 다. 하지만 총칼로 나라를 빼앗은 흉악 무도한 일제 무리에 게 도의나 양심으로 호소해 보았자 ‘쇠귀 에 경 읽기’요,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또 외세에 의존해서 국권을 회복한다면 광복 후, 또 다 른 외세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당시 일제와 맞서서 무장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로 이는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 무모한 투쟁이요, 승산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것도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땅에서의 갖은 악조건 속에서 무장투쟁은 상상을 초월한 가시밭길이었다. 당시 이 국(異國)에서 무장투쟁한 분들은 후일 무슨 대가를 바라고 투쟁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들은 이 땅의 백 성이 된 도리로, 마땅히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찾아 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일제강점 독립운동 초기 중국 동북 (만주)에서 벌인 3대 무장 항쟁 지도자로 김동삼(金 東三),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장군을 꼽는다 고 한다. 만일 이분들의 빛나는, 피 흘린 투쟁사가 없 었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참담한 심정일까?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어찌 말할 수 있으며, 민족정기를 어찌 논할 수 있으랴. 필자는 제1차 1999년 여름, 제2차 2000년 여름, 그리고 제3차 2004년 5월 25~6월 4일까지 모두 세 차례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두루 답사한 바 있었다. 1·3차 답사 때는 동북 삼성(3省) 일대 유 적지를 답사했으며, 중국을 잘 아는 안내인이나 현 지 안내인의 지도로 큰 불편 없이 그 넓은 대륙에 산 재한 독립운동 전적지를 더듬을 수 있었다. 1차 답사 때 안내자는 중국 하얼빈 취원창 태생의 김중생(金中 生) 선생으로 그분은 일송(一松) 김동삼 지사의 손자 였다. 1차 답사는 당시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집안(固城 李 씨)인 이영기(李英基) 변호사의 후원으로 이루어졌 다. 우리 중국 대륙 항일유적답사단은 필자와 김중 생 선생,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 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손자 이항증(李恒曾) 선생 3인의 단출한 답사단이었다. 우리 답사단이 중국의 베이징(北京), 상하이 일대 의 유적지를 답사한 뒤, 흔히 만주라고 일컫는 중 국 동삼성 일대를 답사할 때였다. 그곳 답사 첫날인 김동삼이 나고 자랐던 안동 내앞 마을 김대락의 고택 ‘백하구려’(출 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일송 김동삼 (김동삼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