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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독립운동가 • 유기동 · 김만수 · 최병호 선생 71 년 3명이 무장한 것을 알게된 그들은 쉽게 접근하 지 못하고 중국 경찰서장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서 장은 즉각 경찰청장에게 보고했고, 청장이 하얼빈도 교섭서(交涉署)의 교섭원 차이윈셩(蔡運升)에게 통보 했다. 이에 차이는 빈강진수사(濱江鎭守使) 장자오탕 (張召棠)에게 연락해, 군사를 보내 일본영사관 측에 협조하도록 권유했다. 장자오탕은 군사책임자인 입 장에서 일단 응수하기를 “만일 한국독립군이면 국사 범(國事犯) 선례에 비추어 보호해 줄 일이지, 일본인 을 도와 잡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러자 차이윈셩은 “어떤 유의 범죄든 간에 마땅히 일 본영사를 도와서 잡아주고 교섭을 면함이 옳다.”면 서 강박하였다. 결국은 장자오탕이 자기주장을 접고 보병 · 기병 각 1개 중대를 지원했다. 경찰청에서도 특 경대장 장젠둥(張鎭東)과 2개 경찰서의 서장이 20명 씩의 순경을 데리고 나타나 여관을 겹겹이 포위했다. 그 상태에서 장젠둥이 집안으로 들어가 손전등을 비춰보니 청년 3인이 태연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 다. 장이 먼저 “어디서 왔으며, 무얼 하는 사람들이 냐?”고 물었다. 그 3인은 서슴없이 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조국이 망한 지 오래되었고, 우리 인민이 홍수 와 화마에 깊이 빠져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우리가 독립군을 조직하여 전적으로 복국운동을 행하며 왜 적과 승부를 겨룰 뿐이다.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은 모 종의 임무가 있어서인데, 비밀이므로 밝혀 말할 수 는 없다. 다만 살인 · 강도짓 하는 토비(土匪)는 결코 아니며, 또한 정중히 밝혀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중 국은 우리와 가까이해 온 역사가 깊고 중국인들에게 는 털끝만큼도 악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 떤 경우에도 결코 상해를 가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 더라도 만일 일본인이 온다면 그때는 목숨 걸고 싸 하얼빈 3의사의 ‘전사’와 묘지 안장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1924.4.11, 3면) 독립군 3의사의 하얼빈 항쟁과 순국 사실을 보도한 독립신문  174호(1924.4.26,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