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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 열전 • 댕기머리 열네 살 소녀가 외친 목포의 함성 “김나열” 71 1919년 4월 8일 목포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적 으로 이끈 학교로 그 어느 지역보다 민족정신이 투 철한 곳이다. 국가보훈처(2023년 6월 5일, 국가보 훈부로 승격)는 이 학교 출신 7명을 광복 67주년인 2012년 8월 15일자로 포상했다. 한 학교에서 7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받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들은 김나열(14살) 지사를 비롯 하여 곽희주(19살), 김옥실(15살), 박복술(18살), 박 음전(14살), 이남순(17살), 주유금(16살) 지사이며 2019년에 김복선(16살), 김자현(16살) 지사가 추가 되어 모두 9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이들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모아 놓은 ‘100주 년기념자료관’은 1903년에 지은 건물로 당시에는 선교사 사택으로 쓰던 곳이다. 이 건물은 화강암으 로 지은 목포의 석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축 물(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는 이 학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 어 있다. 목포 정명여학교의 1919년 4월 8일 만세시위 전라남도의 3 · 1만세운동 시작은 1919년 3월 3∼ 4일에 걸쳐 목포·광양·구례·순천·여수·광주 등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이래, 10일부터 광주 읍내에 서 최초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 뒤 영광·해남·담양· 무안·순천 등지에서 시위가 뒤따랐으며 대부분 보통 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목포의 경우에는 3 월 3일 「독립선언서」가 읍내에 배포된 뒤 4월 8일 영 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50여 명이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전략) 아! 우리 동포들아 기회는 두 번 다시 오 지 않으니 때를 당하여 맹렬히 일어나 멸망의 거리로부 터 자유의 낙원으로 약진하라. 동포들아 자유에 죽 음이, 속박에 사는 것보다 나으리라, 맹렬히 일어나 라!” -1983년 정명여학교 천장 공사 중 발견된 격문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가운데 격문을 읽고 있노라면 피가 끓는다. 이천만 조선 인 그 누구의 가슴에도 끓어올랐을 피! 그것도 나어 린 여학생들의 함성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정명여학교의 1921년 11월 독립만세운동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열강들의 군비감축회의에 조선민족대표자가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문제 상정을 촉구해야한다는 민족운동계의 여 론이 비등하였다. 이 무렵 목포부 정명여학교에 재 학 중인 여학생들 역시 『동아일보』 등 신문을 통해 워싱턴회의가 열리는 것을 알고, 이 기회를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김나열 지사는 이 해 11월 14일 워싱턴회의에 조선독립문제 상정을 노년의 김나열 지사(국가보훈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