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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당시61세) 천안 공원묘지에 안장 1934년 11월 3일 전남 화순군 출생 1947년 광주수창국민학교 졸업. 당시 독서회활동 시작,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실천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임. 광주서중에 입학, 전쟁발발까지 민애청 활동에 참가 1950년 전쟁 발발후 광주서중 학내조직활동에 전념하다가 같은 해 10월 입산 1952년 8월까지 빨치산 활동 155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대학원 경제학과 입학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강사 시작, 인혁당사건으로 중단. 1964년 인혁당사건에 연루, 1965년 2심에서 징역 1년 선고 1967년 「한국산업의 지역적 편재와 불균형 발전의 요인분석」을 집필 이후 70년대 중반까지 민족경제론의 기초가 되는 다수의 평론, 논문을 발표함, 홍익대, 국민대, 우석대, 경희대, 충남대, 한신대 등에서 강의함 1978년 「민족경제론」을 출판「민중과 경제」,「전후 30년의 세계경제사조」도 같은 해에 출판 1979년 「임동규간첩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복역함 1980년 「134인 지식인선언」에 참가, 5.18 이후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았으나 풀려남 1981년~1984년 「한국농업의 구상」, 「한국경제의 구조와 논리」, 「한국경제와 농업」,「한국자본주의와 민족운동」등 4권의 저서를 매년 1권씩 출판 1985년 「창작과 비평」제57호에「현대 한국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를 발표, 이른바「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의 단서를 제공함 1986년 「한국경제구조론」출판 1989년 조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취임, 「민족경제론의 기초이론」출판 1995년 8월 16일 93년 뇌줄증으로 쓰러져 약 2년간 투병하다 운명 |138|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김영삼정권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외세를 배제하고 민족자립 경제를 주창한 남한의 대표적 민족경제학자 였으며, ’70~’80년대 가혹한 민주화운동 탄압기간 동안 민주화 운동가로, 빼어 난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며 많은 고난을 겪은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동지는’50년 한국전쟁이일어나자16살의 나이에 빨치산으로입산했다가 ’52년 8월 복부 관통상을 입고 하산, ’55년 서울상대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한국농업문 제연구회’간사로 있으면서, 자본주의 세계경제하에서 한국 국민경제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이론의 온상지 역할을 하였다. ’64년 동지는 소위‘인민혁명당’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어 도예종 은닉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고, 이후 두차례 복역과 구금을 당하였다. 동지의 민족경제론은 한국 자본주의가 종속의 길로 치닫던 시기에 민족의 자 주성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해 ’70~’80년대 민중운동 속에서 중요한 가치를 제공 하였다. 끝내살리라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