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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되었으나 미 군정하 치안은 극도로 혼란하고 더욱이 좌.우익 사상의 극한 대립속에 여.순 반란사건을 비롯한 각종 폭동사건이 잇따르고 동족상잔의 비극의 악순환 속에서 국권의 수호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가 절실하던 터에 유독 장기창 순경은 살신보국 청운의 꿈을 안고 1946년 6월 30일 경찰에 투신 제 23지구 무안경찰서에 모범경찰관으로 근무 중 주민납치방화 약탈, 비협조자 학슬 등을 일삼던 일단의 무장공비들이 1947년 4월 30일 일로면 상신기리와 당호리 일대 마을에 침입한다는 정보를 입수 상신기리 한학동 앞 부근에 매복해 있다가 무장공비 8명을 발견하고 용감히 기습공격을 가하여 도주하는 적을 구정리 죽산부락 앞까지 12km나 추격하는 한편 지서에 적 상황보고와 지원을 요청 적의 도주로인 죽산3리 자방포(도장포)에 미리 매복해 있다가 전원을 사살케 하므로써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동 장기창 순경은 25세의 약관으로 아깝게도 현장에서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이 비보에 접한 무안군민은 슬픔과 애도속에서 무안군민장 제1호로 장례식을 거행하였으며, 아울러 그의 숭고한 구국위민 충정을 기리고자 군 유지들이 성금을 모아 이 기념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당시 전우였던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266번지 거주 채정석옹의 증언 - 1962년 경사로 퇴직) 그후 6.25사변 당시 무안군에 침입한 괴뢰군은 본 순직비에 총격을 가하고 땅속에 묻어버린 것을 뜻있는 무안군 유지들이 1955년 이를 다시 되찾아 무안경찰서로 이전하였다가 1993년 8월 이곳에 안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