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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1월31일 토요일 7 (제229호) 기 획 500만 박씨대종보 한빛신문의 창간 19주년 을 맞아 깊은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종친의 소통과 전통계승을위해걸어온 지난 19년의발자취 가 앞으로도더밝은 미래로이어지기를기원 합니다. 희 망 찬 새 해 가 밝 았 습 니 다 . 종 친 여 러 분 모 두 건 강 하 시 고 , 웃 음 과 기 쁨 이 끊 이 지 않 는 한 해 가 되 시 길 바 랍 니 다 . 주 식 회 사 한 국 특 수 불 연 임 직 원 일 동 조상의 얼과 혼이 담긴 목조문화재 지킴이가 되고자 평생을 걸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역량을 동원하여 방염 방충제를 개발하여 201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 내 최초 KD-500에 이어 KD-600을 한번 더 인증받았 고, FITI 시험연구원에서 1500℃에서도 안전한 방염 제를 개발 합판, 섬유판, 목재 및 기타물품에 사용 적 합판정을받았습니다. 한번 시공으로 목조 문화재를 화재와 해충으로부터 안전하게지켜드리겠습니다. ㈜한국특수불연대표박용태배상 시조왕65세(밀성박씨행산공후) 010-2514-7175 사벌대군의후예들중선조초기에명환(名宦)사벌대군의어느 후예의3부자와세종대왕으로이름을떨친어느한후예가있었는 데 대제학을 지내다가 79세에 죽으니 세종께서 그의 충직한 이력 과담대한성격이낳은여러일화들까지소개하는장문교지로‘貞 肅’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2일 간 조회를 중지시킨바 있는 박안신 (朴安信)이라는인물이다. 그는 아래 소개된 그의 생일 축시(祝詩)가 말해 주듯이 그의 장 남 이창(以昌-신숙주의 고모부)은 세종대왕의 비서실장,차자 이 녕(以寧-김종서장군의동서)은김종서장군의주장(主將)으로당 시문명(門名)을크게떨쳤다. 박안신은 그의 장조카 자완(自完=完昌)과는 달리 즉 려말(麗 末)의신하로조선조태종(太宗)의불음에작시불긍(作詩不肯)함 에태종의벌정(罰定)으로후손들이관향지(貫鄕地-상주)에서대 대로 호장(戶長)직을 맡게 되는 수모를 받게 되었던 그의 장조카 와는 달리 등과(登科)를 거쳐 특히 남다른 담대한 자질로 새 왕조 초기의기틀구축에충직을다하였다. 정숙공박안신의문(文)븡무(武)에걸친두아들의실록(實錄)에 비친여정의일부를아래표로연결하여전해본다. ㉠ 檢븡警 갈등을 世宗께 알게 한 일화 사간원(司諫院)이사헌부의서리(書吏)를강제로잡아국문븡취 조함으로 박이창(朴以昌)이,‘대간(臺諫)의 아전(衙前)은 나라의 명령이없이는서로잡아오지못하는것이관례’라하며,사간원에 회답하는공한(公翰)에서욕을함에이르게되었고,사간원에서는 이를 이유로 모두 피혐(被嫌-업무를하지않고결근)을 감행하게 되었다.양사(兩司)간의 갈등을 듣게 된 세종은 뷺대간(臺諫-대사 헌븡대사간 벼슬의 총칭)의 서리를 서로 잡아오지 못하는 것이 옛 적부터 내려오는 법이냐뷻라 하니, 허조(許稠)가 뷺관원이 직무를 잘못 했을 때에는 즉시 갈아치우는 것이나, 아전이나 소유(所由) 는사헌부의체면을띠고있어잡아올수없는것이옛적부터였습 니다뷻고 했다.세종은 다시 뷺사헌부와 사간원이 서로 헐뜯는 일이 과거에도있었느냐뷻하니권진이아뢰기를뷺과거에도많이있었습 니다뷻고하였다.세종은뷺이창(以昌)으로서는다만자기의사실을 해명하기만 하고 사간원에 대해서 모욕적인 언사를 쓰지 않았다 면좋았지만‘이창(以昌)을석방하라뷻고하였다. ㉡세 살 때에 시를 지었다는 천재꼬마 김시습을 시험해 보라는 세종의 명을받은 도승지박이창은시습을덥석안아무릎에 앉히 고 시습을 어르며 뷺네 이름을 넣어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뷻고 묻 자 뷺예에, 대감뷻 시습은 자신있게 대답하고 글을 외우듯 읊었다. ‘내시강보김시습(來時襁褓金時習 :올 때는 포대기에 싸인 김시습 입죠)’박이창은 기가 막힌 다는 듯이 시습을 한번 추스려 주고는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 키며 ‘저 그림에 붙여 시를 지어 보거라’ 시습은 산수도를 슬쩍 보고나서 ‘소정주택하인재(小亭舟宅何人 在: 정자같은뱃집에누가있느뇨)’라하니박이창은다시시습에게 ‘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 동자의 학식 은창공에높이날아가는힌학과같이아름답다)’라는시문으로칭 찬하니 시습은 망설이지 않고 ‘성왕지덕황룡번벽해지중(聖王之 德黃龍飜碧海之中: 임금님의덕은푸르고아름다운바다속에서뛰 어나르는황룡과같다)’라고답하였다. 이창은 시험을 마치고 어전에 나아가 시습의 천재성을 아뢰었 다.세종은이창(以昌)의말을듣고신동시습을보지못함을안타 깝게여기고‘그아이의재주를함부로드러내지말고정성을다해 가르치도록하라’라는전지(傳旨)를내렸다. ㉢성절사(聖節使)로명(明)나라연경(燕京)에갈즈음마침장 마철이라먼길에대비하여종사관(從事官)들의의견에따라양미 (糧米)를 정량(定量)보다 40말을 더 가지고 갔다. 공이 지난 날에 죄목을 들추어내는 충성을 다하는 과정에서 원한을 갖인 자들이 이를 침소봉대하여말성이 되자‘나라의법을 범했으니성상을뵈 올 면목이 없다븯며 명국 관리들을 피해 정주(定州)까지 와서 자진 (自盡)하였다. 보고를 받은 문종(文宗)은 놀라 후회하며 공은 충성스런 말을 임금께아뢰는 공이컸다며 슬퍼하고 범부로서는 할수없는일을 했다며 사절 노비용 양미 를 추가시켜 이 같은 잘 못된 죄가 나오지 않도록 하였다. ①부사직 박이녕(朴以 寧)이 건주위(建州衛)에 서 돌아와 승전(勝戰)을 아뢰니, 임금이 기뻐하여 인견하고 옷 두 벌을 하사 하였다. ② 행재소(行在所)에 와서배알하니임금이‘사 복마(司僕馬)을 타고서 호가하라’고명하였다. ③임금이 박이녕(朴以 寧)을 인견(引見)하여 방 어(防禦)에대한일을묻고,이내술과풍악을내려그아비를축수 (祝壽)하였다.뱚 ④평안도도절제사박이령(朴以寧)에게유시하기를‘경의임기 가 이미 찼으니,마땅히 체환하여야 하겠으나,사졸(士卒)들이 경 의 용맹과 지략을 잘 알고 있고, 경은 또 적로(賊路)에 대한 우직 (迂直-길의 굽고 곧음)을 잘 알고 있으니, 아직 그 직(職)에 그대 로머물러있으며조금도소홀함이없도록하라’고하였다. ⑤사은부사(謝恩副使)로연경(延慶)에올때의일화 만일에뜻밖의일이 발생하더라도박이녕(朴以寧)이 따라가니염려할것은 없습니다.븣후에연경(延慶)이 사신(使臣)이 되어중국에입조(入朝)하였다가 돌아오자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오로지 박 영공(朴令公)의 덕택입니다’고 하였는데, 박이녕(朴以寧)을 가 리킨것이었다.‘영공(令公)’은서로 존칭(尊稱)하는말인데도임금앞에서이런 말을하니,사람들이모두그를비웃었다. 사나운 견훤(甄萱)의 아비 아자개(阿慈介)가 적수(賊首)로 있 던사벌주(상주)의방어장으로파견된사벌대군은아자개를왕건 군 진영으로 구축했지만 그후 더욱 격렬해지고 잦아진 견훤의 침 입을 호국의 핏줄로 막아냈던 사벌대군, 고립무원이 되자 사벌국 이라는 이름으로 창업까지 하며 사벌주 주변을 평정했으나, 팔공 산에서왕건군5천을괴별시키고(927년)안동대회전(929 년)을 앞둔 견훤군 5천이 돌연 비밀리에 강을 건너 급습 함에 산화(929년)되었던 사벌대군, 그의 14세손의 한 사 람이조선초기의명환(名宦)박안신(朴安信)이였다. 그는남다른담대한자질로부정과무능을거침없이탄 핵하고, 백성들을 위한 12계조, 주민등록제, 오랑케와 왜 구에 대한 대책 등 다양한 상신으로 충직을 다하여 조선 조 초기의 인사제도, 봉록제도, 국방제도, 조세제도의 쇄 신에크게기여하였다. /자료제공사벌국왕후박태순 신라회천을위해고립분투하셨던 사벌대군의어느후예의3부자와세종대왕 정숙(貞肅)공 안신(安信)의 회갑연에 임금(세종) 이술을하사하고,하경재(河敬齋)가축시(祝詩)로 노래하다. “昌文寧武俱豪傑彩舞聯翩紫陌春” “이창(以昌)의 문(文)와 이령(以寧)의 무(武)가 함께호걸(豪傑)스럽고, 채색 옷을 입고 하늘 하늘 춤을추니서울(紫陌)의봄이로다.” 貞肅公3부자의使節行錄圖 沙伐國王 陵을향한 貞肅공의묘 밀양박씨 규정공 후 화록공파 종친회는 지난 해 11월 20일 파조 화록공(휘호현)의묘소를남양주시화도읍차산리처가인기계유 씨 선산에서 400여년 만에 두응촌 선영으로 천창 후 첫 세일사와 한글와비제막식을가졌다. 이날 세일사에는 반계공파 주신 회장이 집례을 맡아 규정공파 대종회 박낙규 회장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이어 양목공파 조신 회장,집의공파 용신 회장이 차례로 각각 헌작하였으며,화록공파 수옥회장이축관으로독축했다. 한글 와비는 한문세대가 아닌 젊은층의 종사참여를 위해 박수 옥 회장이 박성율 해백공파중앙종친회장(규정공파 총괄부회장) 에게의뢰하여비문을지어화록공선조이해를돕기위해일부인 용소개해본다. 븮화록공파(華麓公派)의 파조로 성은 박(朴)이고 이름은 호현 (好賢)이며 자(字)는 계용(李容)이고 호는 화록(華麓)이다. 본관 은 밀양 (密陽)으로 2082년 전 현재의 경주 땅 에 서라(徐羅)라는 나라를 세운 시조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의 56세손이자 관향조 밀성대군 (密城大君) 언침(彦枕)의 27세손이며 중시조인 고려 사헌부 규정(糾正) 현(鉉)의 12세 손으로 서기 1550년(명종 5)에6조판서(判書)모두와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대제 학(大提學)을지낸아버지낙촌공(駱村公)충원(忠元)과첨정(僉 正)을 지낸 이인수(李麟壽)의 따님인 어머니 정경부인 성주이씨 (星州李氏) 슬하의 4남 3녀 중에 넷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중간 생략- 이분은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여 약관(弱冠) 이전 에 훌륭한 문장을 구사(驅使)하였고 21살(1570년)에 생원(生員) 과진사(進士)양시(試)에합격한수재(秀才)였다.같은해에군수 를 지낸 유영의의 따님으로 한 살 아래인 기계유씨(杞溪兪氏)를 배필로맞아슬하에아들셋(安節,安禮,安行)을두었다.-슬하가 계 부분 생략- 1581년(선조 14) 2월 26일에 아버지 낙촌공이 돌아 가시자 평소 효성이 지극하던 이분이 몹시 애통(哀痛)해 해서 득 병(得病)했는데낫질못하고그해3월30일부친상중에돌아가시 니향년(享年)32세였다.사후에증손인병사공(使)신주(新胄)가 귀하게 됨으로서 정3품직인 사복시(司僕寺) 정(正)으로 추증(追 贈)되었다. 장례는 처가인 기계유씨 선영(경기도 남양주시 화도 읍차산리산67-1번지)자좌에모셨는데묘소는배위인증숙인淑 人)기계유씨가임진왜란중인42세때생모와함께왜군에게피살 되어 합평으로 조성했고 비문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우봉인 (牛峰人)도암(陶庵)이재(李縡)가 썼으며 생전에 효행이 지극했 던 숙인 기계유씨의 정려(旌閭)가 묘하에 세워졌다.음력 10월 초 이튿날 세일사(歲-祀)를 봉행해 왔는데 유택이도선영(都先瑩)에서먼곳에외로 이 떨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이분의 서거(逝去)4 44주년을맞아누대(累代)선조들이영면 (永眠)하고 있는 이곳 두응촌(豆應村)제 2묘역의 아버지 낙촌공 유택(幽宅) 아래 로 4월 2일에 천장(遷葬)하였다. 이때 석 물(石物)도 같이 옮겨 세웠으나 비문(碑 文)이 한문 일색(色)이라 현대를 사는 후 손들의 자유롭게 읽고 이해할 수 없음으로 한글 위주(爲主)의 와비(臥碑)를 추가로 세우려고 이분의 17세 손 으로평소에친분이있던화록공파수옥(秀玉)회장이천학비재(淺 學非才)한불초에게비문을청하길래사양하였으나재청(再請)하 는지라차마거절하지못하고위와같이졸문(拙文)으로약(略)기 술(記述)하는바이다. 이분의 서거 444주년인 신라 기원 2082(서기 2025)년 4월 2일에 이분의 13세 傍裔孫인 해백공파 종친회장 성율(性律)이 삼가 이 글을짓고,11월20일에밀양박씨화록공파종친회가이비석을세 우다.븯 밀양박씨규정공후화록공묘역천장븡세일사 봉행 처가인기계유씨선산에서400여년만에두응촌선영으로천장 화록공 묘 소 천장후 첫 번째 맞 은 세일사를 봉행하 고 참례한 제관 과 후손들이 함 께 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