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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2월31일 수요일 7 (제228호) 기 획 충주박씨는부정공박영을시조로대전과충청,호남지역에 산재해 있어 금년 시향은 음10월 1일(양11.20)일부터 대전과 광주등에서12월5일문간공(휘상)시제등이봉행되었다. 먼저 대전시 도마동 영모재 경내에서는 충주박씨 양대산맥 이라 할 수 있는 참의공과 판서공 후예가 모여 추원사에 배향 된 관조인 고려부정(高麗副正) 박영(朴英)을 비롯 참의공 휘 진( 풂 )의 아버지인 의랑공(議郞公) 휘 광리(光理)까지 八世 先祖의 제향을 모신 후 장소를 영모재 뒤 선영에 모셔진 참의 공(휘진)의묘제를봉행하였다. 참의공 묘제는 종원 130여 명이 참석해 선조의 덕업을 기리 고종중의화합을다지는시간을가졌다. 시제 봉행 후 박경석 회장은 인사말에서 “바쁜 일정에도 불 구하고많은종원들이참석해선조를기리는자리를함께해주 신데깊이감사드린다”고전했다.이어“앞으로도선조님들의 숭조 정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종원들이 시제에 참여해 주 시길 바라며,환절기 건강에도 각별히 유의해 주시기 바란다” 고당부했다. 또한 이번 시제를 계기로 종원 간 친목을 강화하고,젊은 세 대의 종사 참여 확대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시제 봉행을 마친 뒤 영모재에서 마련된 오찬을 나누며 종원 간 화 합을위한교류의시간을가진뒤종료되었다. 다음날인21일(음10.2)은참의공의동생판서공휘소(蘇)와 그의 아드님 인흥(仁興), 례흥(禮興), 신흥(信興) 등 사부자 (四父子)의 시향이 판서공파 종중(회장 희조) 주관으로 대전 시문지동의영사암에서봉행된가운데희조회장은선조의음 덕으로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고 말하고 판서 공파는대전의참의공,광주의찬성공파가중심이되고있다며 우리는최선을다하는자세로항상화합하여덕업(德業)을이 어나가자고말했다. 참의공의 장자 강릉공(휘 효함)은 21일 영모재에서 강릉공 파종중(회장 우숙)주관으로 있었다.제향 봉행후 참석자 전원 이 강릉공 묘소로 이동하여 참배 하고, 종원들은 강릉공 묘소 의예장,신도비등유적관리현황을점검하고,후손의입장에 서 앞으로 유적 보존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특히 선조 의 업적과 정신이 후손과 지역사회에 더욱 오래 전해질 수 있 도록체계적인관리·정비가필요하다는데뜻을모았다. 강릉공 종중 박우숙 회장은 “강릉공(효함)의 묘소, 묘비 등 관리는백제문화원에서정기적으로관리하여주고있으나강 릉공의청렴과충의정신은우리후손들이이어받아지켜가야 할귀중한가르침”이라며“선조의유적과기록을보존하고계 승하는일에더욱힘쓰겠다”고밝혔다. 광주광역시서구서창동에선영과집성촌을두고있는찬성 공파는12월4일찬성공파대종회(회장창규)주관으로추원재 에서있었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거하는 과정에 득남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를 피해 은거할 곳을 찾아 남 으로 향하던 중 전남 장성 입암산 갈재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 지자산막에들어하룻밤을묵게되었는데꿈에산신령이나타 나 “내가 너의 살 곳을 일러줄 터이니 지금 밖에 있는 나의 쌍 마를타고가다가그쌍마가멈추는곳이너의살곳이니라.그 곳에 쌍마 중 한 마리를 매어 표를 해두고 오너라.”하였다. 그 쌍마 멈춘 곳이 방마산 이 백마산으 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이정착한뒤2년만에본부 인 하동정씨가 죽고 이천서씨 처녀 와 재혼하여 8년 만에 하촌공(荷村 公)정(禎)을낳고,찬성공의나이63 세가 되던 어느 날 부인서씨와 함께 고향을 찾아 장성 입암산 갈재를 넘 다 산 아래 산막에서 또하루를 지내 게되었다. 이날 밤 부인 서씨의 꿈에 입암산 위에서 큰 바위가 굴러와 서씨의 치 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이듬해 1475년 5월 18일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찬성공이 이 아이의 이름을 태몽에 따라 아 명을입암으로하다뒤에상(祥,시호문간공)이라했다.2년후 셋째아들 육봉공(六峯公)우(佑)를 낳았다.이들 삼형제가 문 장으로세상을울려이들을가리켜당시송나라에는부자삼소 (父子三蘇)가있고동국(東國)에는형제삼박(兄弟三朴)이있 다고하였다. 음력 16일인 12월 5일은 절의의 표상 문간공(휘 상)의 시향 이묘역아래봉산재에서문간공파종중(회장종석)주관으로 있었다. 이날 제향은 갑자기 뚝 떨어진 기상으로 인해 묘소에 참배 후 산신제 봉행 후 형성 현종의 집례로 종율 전 회장이 초헌관 으로 헌작하고 이어 판서공 후 사과공 종중의 희영 회장,찬성 공 창규 회장이 각각 아헌과 종헌을 맡았으며,수철 현종이 독 축했다. 이어 문간공의 장자 휘 민제(敏濟), 장손 인수(仁壽), 그리 고실전된인수공의아들諱진(璡)이하9세11위의의제향을 정해진제관들이각각소임을다하면서충주박씨2025가을시 향이마무리되었다. 눌재박상 선생은 조선성종 때(성종5년,1474)에 찬성공(휘 지흥)의둘째아들로태어나연산임금때에문과에급제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왕을 비롯,종친,훈척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음으로서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 다.곧연산임금때총애를받는궁인의부친으로서향리인나 주에서 권세와 탐학을 자행하던 우부리(牛夫里)를 처단해 버 린일,중종초기언관인사간원의헌납(獻納)직에있을때공 신호를남수(濫收,거두어들임)하는것,외척들을중용(重用) 하는것에대해반대하였던일,중종10년(1515)에는담양부사 로 재직하던 중 반정으로 말미암아 폐위 조처를 당한 중종의 첫 왕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를 복위시키고 왕비의 폐위를 주도한 박원종 등 반정의 3훈신(勳臣)을 임금을 협박 한 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일 등으로 여러 차례옥에갇혔다가풀려나기도하고,먼곳으로유배당하기도 하였으며, 상주·충주 목사(牧使) 등 주로 외직으로 전전하였 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불의에 대한 과감한 지적과 비판은 이 시 기정신적지표가되어이후의리사상을선도한인물로서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사림의 영수 조광조(趙光祖)는 “그 의 ‘신 씨복위상소’는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 한바있다. 눌재는 또 역사적으로 븮동국사략 (東國史略)븯을저술하기도하였는데 이는고려시대까지의역사를정리하 면서 특히 절의의 사적을 널리 들어 내고자 하는 의도로 편찬한 것으로 이해되고있다. 그런가 하면 눌재는 외직으로 담 양부사, 충주목사로 재임하던 때에 두 차례에 걸쳐 청백리로 뽑히기도하였고,일찍별세한형님박정(朴禎)을대신하여가 사를 돌보며 아우인 육봉(六峯) 박우(朴祐)가 진사시에 합격 하자 형님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음을 슬퍼하면서 재산을 나누어주어 형제간에 지극한 우애심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 다. 눌재 선생의 첫 번째 부인은 증 정부인 진양유씨이고 두 번 째 부인은 증 정부인 하동정씨이다. 슬하에 민제(敏齊), 민중 (敏中),민고(敏古)삼형제를두었는데,차남민중(敏中)은후 사가 없어 백형 민제(敏齊)의 차남 희수(希壽)로 하여금 후사 를이었으나장자의민제(敏齊)의아들인수(仁壽)공또한후 사가 없어 희수(希壽)의 아들 진(璡)을 입적시켰다.문간공의 손자 희수(希壽)는 임진왜란에 호남지역 의병장 고경명 장군 과 회재 박광옥 선생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적을 세 워호남의병사에자주거론되기도한다. 특히후손들의선조선양사업은더욱활기차다.선조의유훈 과남긴시문을주제로지역서예가들을초청서예대전을여는 가하면학술대회를통해지역사회에남긴철학과사상을확산 시키고 있다. 그리고 최근 문간공 신도비 주변 정화사업은 현 재주변정비를마치고조만간비각을세워비석의풍화작용을 막을예정이다. 박종석 회장은 이날 시제 봉행 후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재실에서 제사를 봉행하게 되었으나 선조님을 향한 숭조정신 은변함없어야할것이라고말하고그동안의사업을보고하고 원로종친인하온현종에게이날제사의강평을당부했다. 이에하온현종은부조묘향사와묘제의성격을설명하고족 보에 기록되어 전해오는 전통예절에 소홀함이 없기를 당부하 며홀기와제례순서등을한번보아주길바란다고말했다. 충주박씨2025가을세일사봉행 음10월1일~10월16일까지븣문간공(휘상)신도비주변정비사업한창 참의공묘제광경 강릉공(휘 효함)의 제향 봉행후 참례한 종원들이 묘역을 찾아 성묘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묘역 좌측 신도비는 세조1년인 1 455년 세워졌으 며,비문은조선초기대표적인문신이자학자인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박종석 회장이 고유를 위 해잔을올리고있다. 문간공 시제에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묘역 아래 봉산재에서의 제향봉행을위해먼저묘소를찾아참배하고고유하고있다. 박종률 회장이 문간공제향에초헌관으로 헌작하고있다. 박하온 원로 문간공 신도비 정비사업이 한창이다. 이번 정비 사업은 주변 잡목을 제거후담과 축대를쌓고잔디를식재후비각을건립하게된다. 삼전리는강릉공의차자휘원창(原昌)공의후예600여년의 집 성촌이다.우리나라 현존하는 족보 중에 최초의 족보를 만든 주인 공이다. 공(公)은 백씨 영동공(휘 원창)과 함께 동방 사마시에 올라 장 악원첨정과상주목사를역임하고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성종5년(1474년) 갑오(甲午)에 충주박씨 족보를 수찬하였고, 이어 안동권씨의족보를 양촌 권근의 아들 권제와 서거정,대구부 사 최호원과 함께 수찬하였는데 公과 서거정은 양촌공의 외손이 다. 상주공(휘 원창)은 부인 수안이씨와의 사이에 훈(壎), 서(墅), 숙(塾)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훈(壎)은 사직(司直)이고 차남 서 (墅)는 조산대부 헌릉(조선 태종과 그 비인 원경왕후 민씨)참봉, 셋째숙(塾)은장사랑(將仕郞)이다. 상주공의 후예는은진현(恩津縣)가야곡(可也谷)현 논산시 가 야곡면삼전리에뿌리를내린이후가야곡을중심으로연무,연산, 부여,용담등에세거(世居)하고있어세거지비문을곁들여본다. 충주박씨(忠州朴氏)는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시조로 하 고, 고려 부정(副正)을 지내신 관조(貫祖) 영(英)께서 개성으로 이주하여8세개성소윤(開城少尹)을역임한광리(光理)까지거주 하였다. 광리는두 아들참의공(參議公)진( 풂 ),판서공(判書公)소(蘇) 와함께여말선초(麗末鮮初)왕조교체기에개성을떠나충청도옛 덕진현(현대전서구,공주일원)으로내려와그곳을세거지(世居 地)로삼아호서(湖西)의고반(古班)이되었다 . 후손들은 도동(도마동)에 추원사(追遠祠)를 짓고 관조 영을 비롯한 8세까지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9세 참의공 진( 풂 ) 후손들 은 추원사 아래의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종중의 본산(本 山)으로 삼아 봉사하고 있다. 참의공 진은 효함(孝 ), 충함(忠 ), 제함(悌 ), 신함(信 ) 등 4형제를 두시었다. 첫째 아들 효함(孝 )은통정대부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지 내셨으며 슬하에 영동공(永同公) 원직(原直)과 상주공(尙州公) 원창(原昌)을두시었다. 상주공은 벼슬길로 나아가 장예원첨정(掌隸院僉正)과 상주목 사(尙州牧使)를 역임하고 조선 성종 5년(1474년)에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의 족보인 충주박씨성화보(忠州朴氏成化譜)를 수 찬(修撰)하시었다.한편으로는 인심이 후덕한 은진현(恩津縣)가 야곡(可也谷)에 뿌리를 내려 후대로 이곳을 세거지 및 후손들의 세장지(世葬地)로 삼아 문중가훈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돈목 (世守敦睦)을실천하면서많은후손들이가야곡을중심으로연무, 연산,부여,용담등에세거(世居)하고있다.상주공원창은숙부인 수안이씨(遂安李氏)를맞이하여훈(壎),서(墅),숙(塾)세아들을 두시었다.서(墅)의 아들 한림공 억년(億年)은 중종 32년(1537년) 진사시 합격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시고 문학과 덕행으로 당세의 명망이 높았으며 사후 한림공 파조(派祖)가되시었다. 15세 성장(成章)은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셨고 아 우 성명(成明)은 효성이 지극하고, 문학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 으니 임금이 여섯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아 육한당(六閒堂)이라 호를 내리고 살던 마을을 육한촌이라 하였다.그리고 후손들은 대 대로 조상들의 음덕을 잊지 않고 학문을 숭상하며 이웃들과 함께 고을 발전을 위 해노력하였다. 지금도 선조들의 묘소가 이 고을을 지 키고 있으며 가야곡은 세거지로서의 위 상을면면히이어오고있다.이에이곳에비를세워선조들의자취 를기억하고종중의 유래를 후세에널리 알려명문가의위상과 자 긍심을기리고자한다. 신라시조왕혁거세사벌군후손충주박씨분관조고려부정공휘 영의 구세(新羅 始祖王赫居世 沙伐君後孫 忠州朴氏 分貫祖 高麗 副正公諱英의九世) 참의공파 진 선조님의 장자 강릉공파 효함의 차자 상주공 원창 종중(參議公派 풂 先祖님의 長子 江陵公派 孝 의 次子 尙州公 原昌종중)-△고문(顧問)중노(中老),상구(常求)△회장계영(啓 永) △총무유사 원중(源中) △위원(委員) 계호(啓鎬), 원중(源 重), 용우(容雨), 용구(容九), 용성(容聖), 지식(枝植), 문식(文 植),정식(貞植),헌성(憲晟)△감사(監事):병호(炳晧)외종원일 동-후원:충주박씨강릉공파종중 ▶6면에서계속 상주공세거지비제막식에60여종친이 참여하며세거지비건립에대한 종원들의열망(熱望)을들여다볼 수있다. 충북논산시가야곡면삼전리 상주공 세거지비, 뿌리공원의 충주박씨 유래비형식을갖추었다. 충주박씨상주공휘원창세거지비 (忠州朴氏尙州公諱原昌世居地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