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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0월31일 금요일 7 (제226호) 특 집 장자 희량은 성균생원이고, 둘째 생원 희공의 셋째 이분(而芬) 의손자우생(禹生)의자는성보(聖輔)호는송암(松菴)으로임진 왜란에 공을 세워 특진으로 군자감정에 제수되었고, 녹진전투 수 훈으로해동록에오르고,1598년노량진전투에서 수 천여 적을 참 살(斬殺)하였으나적의탄환에아쉽게도순직하였다.그리고후손 들은그의호를따송암문중으로세계를이룬다.송암공의아들후 립(厚立)의호는죽계(竹溪),통정대부병조참의에올랐다. 셋째희검(希儉)은충무위어해장군으로아들이훈,이훤,이전, 이분등사형제를두었는데장자이훈(而薰)의아들영민(英敏)은 사간원헌납,손자경립(敬立)은통정대부에가자되었다. 둘째 이훤(而萱)은 백부 희량의 뒤를 이었고, 셋째 이전(而筌) 의아들여민(汝敏)의호는청은처사(淸隱處士)로 학행이있었으 며 그의 넷째아들 홍남(弘男)의 7대손 기열(基烈)과 8대손 상만 (祥萬) 부자는 효행이 뛰어나 표창이 뒤따랐으니, 기열(基烈)의 호는심원당(深源堂)으로아버지가평소강의물고기를즐겨하였 으므로,겨울마다얼음을깨고물고기를잡아올렸다.부친이병이 나셨을 때에도 강의 물고기로 효험을 얻으셨고,병이 나으신 뒤에 도 밤낮으로 드시기를 즐거워하셨다.그 효행이 여러 번 천거되어 조정에서표창문이내렸다. 아들 상만(祥萬)의 호는 지행당(止行堂)으로 천성이 온화하여 부모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다.부모를 봉양하는 도리는 어려서부 터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공손하고 근면하여 부모가 편안하 고즐겁게지내셨다.형제들과는화목하고즐겁게지내어,고향사 람들도 그 덕화에 감화되었다.이에 심공(沈公)이 그 덕택을 널리 펴고호남을순찰하던중,먼저그의효행을들으시고으뜸으로천 거하여표창하였다. 청하서원(매포박동립,청류당박동현선생등이배향되어있다. 선무랑공의 셋째 희양(希讓)의 아들 이화(而華)는 명종(明宗) 4년(1549)기유(己酉)식년시(式年試)[생원]3등(三等)44위(74/ 100)로합격한성균생원이다.아들정민(廷敏)은종사랑으로동길 (東吉),동립(東立),동진(東振),동혁(東赫),동현(東顯)등5형제 모두 현달했다. 이중 둘째 동립(東立)과 다섯째 동현(東顯)은 사 계김장생선생문하에서수학하였다. 동립(東立)의 호는 매포(梅圃)인데 1566년 12월 13일 전북 완주 (현전주)에서태어났다.타고난성품이강직(剛直)하고총명함이 또래보다 월등했다. 성장함에 사계 김장생 선생을 찾아 수학(受 學)하였다.사서(四書)와근사록(近思錄)등의글을받아전심(專 心)으로탐구하여게을리하지아니하고더욱부지런하니사계선 생께서특별히아끼고허여(許與)하였다. 어머니께서 구심구세(九十九歲)에 평안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 나니선생의나이칠십칠세였다.초상(初喪)치루기를예경(禮經) 과같이하여삼년을지내고 일년을 더하여마치니 사람들이 이르 기를 효성(孝誠)이 지극하다 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생원(生 員)븡진사시(進仕試)에 모두 합격,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전주 태조 이성계)이 되었고 성상(聖上, 仁祖)께서 개옥〈改玉:즉위(卽 位)〉하신다음해에말미암아유능(裕陵,고려예종의능)과강릉참 봉(康陵參奉,조선제13대명종의릉)을역임(歷任)하였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분연이 일어 나 의병을 일으켰다. 1624년(甲子) 반정을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 지만, 인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공신 이괄의 반란으로 즉위 1년도 못돼 한양을 떠나야 했다. 이때 선생은 동지(同志)와 모든 사림(士林)으로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는 도유사(都有 司)로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장병들을 정성스럽게 가르쳐 병졸 (兵卒)을 만들고 재력(財力)을 모아 포미(布米)를 모았으나 중도 (中道)에 난(亂)이 평정(平定)함을 듣고 포미(布米)등의 물건을 본관(本官)에 헌납(獻納)하였다.또병자년(丙子年,1636)에 청나 라가침입하여일어난난리(亂離)에의거(義擧)를하여일편단심 (一片丹心)으로 국가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였으나 중도에 화친 (和親)이이루어짐을듣고통곡하며고향으로돌아와은거했다. 다섯째 휘(諱) 동현(東顯)은 광해군(光海君) 4년(1612) 임자 (壬子) 식년시(式年試, 司馬試) 급제하였고, 어버이를 섬기고 모 든형(兄)에미치기를효(孝)와우애(友愛)로서일관했다. 광해 폐조(廢朝)에 중형 참봉공(仲兄參奉公,매포 박동립)으로 더불어 붓을 떨쳐 상소(上疏)를 초(草)하여 궁궐에 나아가 상장 (上章)으로 항의(抗議)하니 적신(賊臣) 유희분(柳希奮)이 바야 흐로폐의(廢議)를주장하더니공의항소(抗疏)함을듣고사람으 로하여금만나기를요구하여이해로서달래서당중인(黨中人)을 삼고자하거늘공이소리를가다듬어꾸짖어이르기를뷺사람이신 하가되어국가로하여금윤리와기강(紀綱)을멸(滅)하고끊기게 하여 장차(將次) 불궤(不軌)의 흉모(凶謀)를 하니 복재간(覆載 間)에 한 큰 난신(亂臣)이라뷻하고 드디어 소매를 떨쳐 일어나 대 궐로 나아가 피를 뿌리고 글을 올리니 희분(希奮)이 가(可)히 위 협(威脅)하지못할것을알고그무리에게부탁하여간사(奸邪)한 백반(百般)의꾀로저알하여마침내이룸에오르지못하니선생께 서 시사(時事)의 가히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과거의 업 (業)을폐(廢)하고세상일을사절(謝絶)하니이에거두어품어물 러나임학(林壑)에은거(隱居)하여세상과함께가고돌아오지아 니하니세상에아는이가적었다. 좌승지 휘 결(潔)의 차남 알백(閼白)의 호는 한백(漢白), 그의 아들석진(錫縉)은김해창해로세거지를옮겼으며,아들말손(末 孫)은 선무원종공신으로 훈련원 첨정이다.그리고 첨정공의 아들 승택(承澤),손자 한로(漢老)는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에 올랐 다.좌승지 휘결(潔)의삼남 경충(敬忠)은군수를 지내고경북청 송으로세거지를옮겼다.아들무수(茂秀)는판관,손자구록(求祿 은부사,증손두채(斗采)는문과로군수이다. 소윤공파는 행산공의 차남 소감공(휘 문익)의 아들 형제(신좌· 신필) 중 장남으로 휘는 신좌(臣佐)이다. 한성소윤(漢城少尹)을 지냈으나아버지소감공이역성혁명에참여하지않고불사이군의 절의를 보이면서 公또한 함께 절의를 지키며 밀양에 은거하여 경 서 탐구에 매진했다. 전라도 태인군 옥박동 (현재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으로(現在 玄岩文中) 입향조이기도 하다. 아들 서(舒)는 조선 태종 14년(1414) 문과에 등제하여 성균관 사예를 지내고 예 조판서에추증되었으며,특히예학발전에크게기여했다. 손자 반(盤)은 통덕랑(정오품 상의 문관 품계)으로 아들 지령 (志齡),지건(志建),응축(應祝),학운(鶴雲)사형제를두었다. 장자지령(志齡)병절교위,아들문성(文星)의호는영호(瀛湖) 경학(經學)에 잠잠하여 훈도(訓導)에 천거되었고,예종조 1469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판관을 지냈고 옥당(玉堂,홍문관의 별칭) 수찬을지냈다.아들리(鯉),추(鰍),구(龜)삼형제를두었는데셋 째구(龜)는무후이다. 장남 리(鯉)의 호는 국포(國圃)이다. 성종조에 창릉 참봉에 이 어찰방을지냈는데그기록이고부읍지에전해진다. 국포공(휘 리)은 아들 원량(元良), 원순(元純), 원철(元哲), 원 성(元誠),원신(元信,无后)등5형제를두었다.장자원량(元良)은 무후(无后)이고,차남원순(元純)의아들정민(挺珉)의호는청암 (淸菴)으로타고난자질이굳세고확고하며경학(經學)에대한심 오한 지식을 타고났으며,산과 강에서여유롭게 산책하는 것을 좋 아했는데그사실이고부구청금안에올라있다. 청암공(휘 정민)의 아들 재(載)의 호(號)는 현암(玄岩)으로 우 암 송시열의 문인이다.현암공은 세유(世維)·세경(世經)·세위(世 緯) 삼형제를 두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이에 장자 세유(世維) 는 종파(宗派)이고 차자 세경(世經)은 중파(中派) 셋째 세위(世緯) 는 계파(季派)로 각각 나뉘어 소파조(小派祖) 각기 번창하였다. 삼형제 모두 뛰어난 학자로 지역의 문풍을 일으켰으며 이중 차남 세경(世經)은 우암 송선생의 제자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다. 우 암 선생의 유배지까지 찾아다니며 스승의 예를 다하였고, 정읍에 서사약을받고서거한스승에대한예를다했다.그리고우암선생 사후 4년 후인 1693년 정읍에 노양서원(魯陽書院)을 세우고 선생 의높은학덕을기렸다.이후노양서원에는현암박재선생과그의 아들 두남 박세경을 추배했다. 국포공의 셋째 원철(元哲)은 호군 (護軍),아들유선(惟善)은장사랑(將仕郞)이다.넷째 원성(元誠) 의아들이동(以東)은진사이다. 통덕랑공 휘 반 (盤)의 차남 지건 (志建)은 병절교 위에올랐고,정읍 현암동에 설단하 였다. 그의 아들 윤후(允厚)는 참 봉, 손자 응천(應 天)은 첨지중추부 사, 증손 성우(成 佑)는 장사랑으로 아들명융(鳴融),제령(濟齡)을두었는데장자명융은인조경오년 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행 익산군수를 지내고,강원 평창군 대관령면으로세거지를옮겼으며,차남제령은증가선대부이다. 통덕랑공의 셋째 응축(應祝)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아들 희 남(稀南)은 통정대부에 가자되었고 이후 손자 증손 현손 모두 현 달하여동지중추부사,통덕랑,가선대부에올랐다. 통덕랑공의 넷째 학운(鶴雲)은 진사인데 한성판윤에 추증되었 고,아들숙인(淑仁)은진사로증공조참판,손자덕희(德熙)는참 봉으로 증 자헌대부호조판서이다. 이는 아들 봉수(鳳壽)와 봉서 (鳳瑞) 형제가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3대 추증을 한 것이다. 장남 봉수(鳳壽)는 1579년 무과에 급제하여 가리포 첨사 와 봉화현감으로 진력(盡力) 선정(善政)하였으나 조정의 군신들 의당쟁으로국정은극도로혼미함에개탄하고퇴관(退官)하여향 리의초야에은거하였다.임진왜란을당하여경울(慶蔚)의선비들 과 기박산성에 모여 장단(將壇)을 모아 결진 편대하니 대장에 추 대되었다.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임란 1등공신으로 행 김해 부사, 절제사, 부총관, 포도대장을 지냈고, 차남 봉서(鳳瑞) 백형 봉수를따르며공을세워임란1등공신으로훈련원정을지냈다. ▲현암리영주정사 영주정사는서기1903년 건립(建立)하고 찰방 박만환 선생에 의 해건립되었다.고책(古冊)일만권서(一萬卷書)와고책목판(古冊 木板)등을 소장(所藏)하고 문소(聞韶) 김형재(金衡載, 1843- ) 선생에게 영주정사(瀛洲精舍) 운영권(運營權)을 주고 학감(學 監)을 응원(應元) 고인주(高鱗柱 1873-1927)선생으로 하고 매년 (每年)운영비(運營費)로삼백석(參百石)을자비출연(自費出捐) 하여 학동(學童)들에게 지·필·묵(紙筆·墨)은 물론 숙식(宿食)도 무료제공(無料提供)하게하여후학양성(後學養成)하던곳이다, 특히 영주정사 강당은 주거형 평면을 도입하여 난방의 효율성 과공간이용의합리성을추구하여근대기한옥(韓屋)의특징을잘 보여 주고 있는 건축사적(建築史的) 역사적(歷史 的)가치가있는곳이다, 간재(艮齋)전우(田愚1841-1922)선생께서190 2년10월-1908년10월(약6년간) 거숙(居宿)하시며 영주정사기문(瀛洲精舍記文)과 상량문(上樑文) 그리고 영주정사(瀛洲精舍) 백천재(百千齋) 청풍 헌(淸風軒)등의 친필(親筆) 현판(懸板)과 심석 (心石)송병순(宋秉珣1839-1912)선생의백천재기 문(百千齋記文)과 석촌(石邨)윤용구(尹用求1853 -1939)선생의 봉서루(鳳棲樓) 재월정(齋月亭) 영 향정(永香亭)친필과 병암(丙菴)김준영(金駿榮18 42- )선생의 영주정사기문(瀛洲精舍記文)등 판각 (版刻)이현존하고있다.(원본소장) 서기1910년 한일합방후(韓日合邦後) 서기1916 년부터 학동(學童)의수가 점차감소(漸次減少) 하 여서기1955년까지는그래도명맥(命脈)을이였다고한다, 1972년 창암(蒼巖) 박만환(朴晩煥)의 차손자(次孫子) 송하(松 下)박용호(朴龍鎬1918-2002)께서 유지관리(維持管理)가 어려워 지자 일만권서(一萬券書)의 고책(古冊)과 목판(木板)등을 서울 大學校규장각(奎章閣)에기증(寄贈)사료연구(史料硏究)케하여 현존되고있다,(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 영주정사에서 수학한 인물을 보면 일여 박승규(朴升奎 유학자. 독립운동)가인김병로(金炳魯초대대법원장)근촌백관수(白寬 洙 독립운동가,전국회의원)현곡 유영선(柳永善 유학자)인촌 김 성수(金性洙고려대학교,동아일보설립자,2대부통령)수당김년 수(金秊洙삼양사 설립자)응원 고인주(高鱗柱유학자,독립운동) 운재고응중(高應中유학자)치관박봉규(朴鳳奎유학자)익중김 기홍(金基弘유학자.독립운동) 구파 백정기(白貞基 독립운동가, 의사)민식 최동규(崔東奎 유학자.독립운동)자천 박방원(朴方源 유학자)양재권순명(權純命유학자)삼농한성수(韓誠洙유학자. 독립운동) 고재일(高在一 유학자) 라용균(羅容均 보사부장관,국 회부의장) 윤재술(尹載述 국회부의장)先生 외 一百三十(130)여 명등우리나라를이끌어가는명현들이줄줄이다. 진사공파는소감공(휘문익)의차남휘신필(臣弼)을파조로한 다.백형 소윤공(휘 신좌)와 함께 역성혁명에 함께하지 않은 조부 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거하면서 묘소가 실전되어 고령군 대가 야읍일량리내일양재(一陽齋)후원에부자5위설단하였다. 장자 서( 쉭 )는 진사(進士), 차남 유(維)는 총랑(摠郞), 셋째 수 ( 沸 )는 학생, 넷째 훈( )은군수이다. 첫째 진사공(휘 서)의 아들 창(菖)은 인강(仁康), 인춘(仁春), 인방(仁邦) 등 삼형제를 두었다. 장남 인강인강(仁康)은 찰방(察 訪)이고 그의 아들 천언(天彦)은통덕랑,현손 승원(承元)은인조 조에가선대부에가자되었다. 차남 인춘(仁春)의 호는 동호(東湖)인데 부사(府使)를 지냈다. 아들화언(華彦)의호는석은(石隱)으로성균진사이다.한강정구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임진왜란에 스스로 청도 풍각으로 이 거 인동천산성에서 의거하여 망우당 곽재우 장군에 협력하는 등 난 진압에 공헌하였다. 석은공은 아들 광련(光連),방창(芳昶)형 제를 두었는데 광련은 성균생원, 그의 아들 방영(芳英)은 통훈대 부 행 옥천군수를 지냈다. 석은공의 둘째 방창(芳昶)은 가선대부 에추증되었다. 진사공(휘 신필)의 차남 유(維)는 사마시에 올라 총랑(摠郞)을 지냈다. 아들 만(萬), 화(華), 유(裕)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만 (萬)의 아들 수근(秀根)은 무후(无后)이고,차남 화(華)는 소윤을 지내고 성근(成根), 천근(天根), 정근(貞根) 등 삼형제를 두었는 데장남성근(成根)은무과로군수,그의아들승(昇)은진사,손자 하연(河連)은 훈련원첨정, 증손 개상(凱尙)의 號는 태허정(太虛 亭)으로 주부를 지냈는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 사에추증되었으며,공은가세(家勢)가성(盛)하였으나차면기우 는 이치(理致)를 염려하여 거처를 옮기고 자취를 감추어 뜻을 구 함이 옳으리라 하여 산수를 살피다 이곳에 이르러 「이곳은 행촌 (杏村) 도촌(桃村) 권포(權圃) 묵재(墨齋)의 네 선생의 사원(祠 院)과 거처할 곳이 가까우니 무릇 어진 이를 높이는 장소를 얻었 다.」하여밀양에서경남고성으로이주했다.태허정공의아들난립 (蘭立)의호는성곡(聲谷)으로품성이올곧고효행이뛰어나아버 지가 돌아가시자 려묘 3년 동안 지극한 정성을 다해 그 기록이 읍 지에전하고가선대부오위장(五衛將)에추증되었다. 소윤공(휘 화)의 차남 천근(天根)은 통덕랑으로 아들 성(惺)은 봉사인데 아들 만(晩), 명복(命福), 명걸(命傑)을 두었는데 장남 만(晩)은 무후(无后)이고, 차남 명복(命福)은 진사, 진사공의 아 들금호(錦浩)는통정대부이다. 소윤공(휘 화)의 셋째 정근(貞根)의 아들 동신(東新)은 한성부 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냈다. 그의 아들 경한(慶翰)은 통 덕랑이고손자창우(昌佑)응공조참의에추증되었다. 총랑공의셋째유(裕)는우윤(右尹)을지내고아들춘(春)은통 덕랑, 그의 아들 한수(漢壽)는 임진왜란에 창솔촌을 지나가는 적 과 싸워 공을 세움으로서 통정대부 절충장군에 올랐다.그의 아들 응복(應福)의 자(字)는 여일(汝逸), 호(號)는 도암(桃菴) 1592년 임진왜란이일어나적세(賊勢)가매우창궐하고경주지방이적의 통로의 요충지로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이에 초야의 의사(義士) 들이창의궐기(蹶起)함에아버지(휘한수)께서마을의장정들을 인솔하여 적진으로 달려갈 때 선생의 나이 11세 임에도 팔을 걷어 부치고따라가기를원하며이르기를븮국가(國家)에대난(大難)이 있는데다만몸을피해달아나려고하는것은대장부(大丈夫)로서 할 바가 아니다.더구나 어버이께서 친(親)이 칼날을 무릅쓰고 달 려가시는데 소자(小子)도 역시 마땅히 시석(矢石,전쟁에서 사용 하는 무기)의 사이를 사양(辭讓) 할 수 없습니다. 어찌 남의 신하 (臣下)가 되고 자식(子息)이 되어 군부(君父)의 위급(危急)에 함 께하지 않겠습니까?뷻하였다.이에 대인공(大人公,아버지)께서 그 뜻은 장하게 여기면서도 나이 어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만류하였 으나 듣지 않고 시종(始終)모시고 따르며 힘써 군사를 익히니 기 예(技藝)가 날로 진취(進就)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렀 다. 1597년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할 때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고을 을 가보고 나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하여 많은 적을 참획(斬獲)하 고창암(倉巖,영천동쪽끝)전투에서적의유탄에맞아말에서떨 어져 거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 이때 노(奴) 기복(基卜)이라는 者가 있어 부호(扶護)하여 일단 적을 피해 응급구료하고 선생이 타던말을타고달려가집에알렸다. 대인공(大人公)이 그때 화왕산성으로 달려하려다가 이 급보를 받고창암으로급히달려가가마에태워돌아왔다. 선생이 전장의 상처가 체 낫기도 전에 병(病)을 무릎 쓰고 다시 일어나 전장으로 달려갔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듣고 장(壯)하 게 여겨 훈련원봉사에 제수하고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錄勳) 하였다.아버지 거상(居喪) 예(禮)를 다하하는 등 그의 행위가 뛰 어나 인조 임오년(1642)년 암행어사 오모(吳某)가 조정에 진달하 여용양위부호군을더해주고통정대부에승진(陞進)하였다.그의 10대손곤복(坤福)의초휘는병복(炳福),자(字)는원뢰(元雷),호 (號)는고암(古庵)이다. 퇴도(退陶,이황)의학맥을계승하여교남사류(嶠南士類,영남) 의종사(宗師)가된회장장석영(晦堂張錫英,1851∼1929.독립운 동가·유학자.) 스승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항일의사이자 석학 (碩學)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흠양하여 종유교밀(從遊交密)하였 다.또한시인으로항일하다옥사한육사이활선생과교분이두터 웠으며,당대 거유인 문암 손후익,회계 장조현,극암 이기윤 선생 과더불어동문으로회보(會輔)의자익(資益)이있었으니선생의 고상한인품을십분짐작할수있다. 1945년에광복을맞이하여지방유지회장에선임되었으며,또계 성중학교한문학강사로선발되어많은후학을양성하다가모부인 (母夫人)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예제(禮制)에 넘치는 지나친 애 통(哀痛)으로 병(病)을 얻어 1948년 2월 27일 상기(喪期)를 마치 지못한대향년53세로고종(考終)하였다. 진사공(휘신보)의셋째수( 沸 )의손자성번(成蕃)의호는호는 신재(愼齋),문과에급제하여예조좌랑,사헌부지평을지냈다.그 의아들천주(天柱)는밀양에서창녕대합으로이거했다. 진사공(휘신보)의넷째휘훈( )은 군수, 그의 아들 우현(宇 玄)은 한성판윤, 손자 원동(元東)은 증 참판, 증손 원손(遠孫)은 통덕랑이다. 행산공의 후예는 밀양시 부북면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세거했 다. 이후 찬성사공(휘 신열)의 후손들은 선조의 고호(古號)를 지 키며 밀양,후사포,청도흑석,남산,밀양사촌,청운,경북경산,전 북 정읍, 강원 삼척, 대구, 신경(臣敬)은 이조참판파로 창녕 계성, 밀양봉황,신보(臣輔)는 이조판서파로 청도 흑석,밀양안곡,함안 외암, 경북 영일, 신총(臣寵)은 이조참판공파로 밀양 상동, 전주, 경북청송,신좌(臣佐)는소윤공파로전북정읍,강원평창,부산덕 포, 울산평창, 신필(臣弼)은 진사공파로 전북 정읍에서 이거하여 고령 내곡, 부산온천, 고성월계, 경주 건천, 김해 내덕, 창녕 월계, 경산남촌,울산천진에집성촌을이루며세계를이어오고있다. 뱚▶6면에서이어짐 심원당븡지행당부자효행비 청하서원(매포박동립,청류당박동현선생등이 배향되어있다. 뱚△소윤공파 소윤공후예유적도(정읍시현암마을) 노양서원 전경,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선생을 주벽(主壁)으로 위패(位 牌)와 영정(影幀)을, 두남(斗南) 박세경(朴世經)선생을 배향(配享)으로 위 패(位牌)를봉안하였다. 세장원,강원평창군대관령면 뱚△진사공파 일양재전경,경북 고령군대가야읍안일량길10-3 원천재전경,경남고성군삼덕리1704번지(월계마을), 태허정공(휘개상)을 비롯한 선조 재사(齋舍)이고, 일제강점기 어두웠던 민족사를 여실히 간직 하고 있다. 당시 부근의 성암서숙이 철거되고 현 위치에 1914년 건립되어 장서실(藏書室)1칸을두고있어성암서숙을대신하여집안의자녀교육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