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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9월30일 화요일 7 (제225호) 특 집 아들진인(振仁)의호는창암(蒼巖)으로부모에대한효심이지 극하였으며,모친상을 당해서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삼년을 시 묘했다.이 효성에 감동하여 무덤 옆에 바위틈에서 죽순이 솟아나 서 성장하므로 이로 인해 산과 마을이름을 죽암(竹巖)이라 했다. 올바른행위로선원전(역대임금과왕비의초상화를모시던건물) 참봉에천거되어제수되고수직으로부호군이되었다. 모헌공(휘 양춘)의 10世 상일(尙鎰)의 호는 감암(紺巖)으로 창 녕군수,밀양군수를 지내고,통정대부에 올랐다.국책보상운동 등 주권회복운동을펼쳤으며,밀성대군단소건립에주도적인역할을 하였다. 안 국 암 공 의 차자 신 (愼)의 호 (號)는 무진 재(無盡齋) 이다. 도산 (陶山, 이황) 의 문인 동고 이준경의 추 천으로 동몽 교궁(童蒙敎 宮)이 되었 고, 행의 또 한 뛰어나 수 차에 걸친 추천으로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으며 군자감정에 추증되었다. 아들 장춘(長春), 수춘(壽春). 득춘(得春)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장춘은 무후이고 차남 수춘(壽春)의 자는 경노(景 老),호는국담(菊潭)으로1572년(선조5)11월경남밀양군부북면 삽포리에서 태어났다. 국담은 어릴 때부터 충효절의 학덕을 고루 갖춘명문가집안에서성장하면서학문을쌓았다. 1592년 21세 때 임진왜란을 만나 부모 형제와 청송으로 피난하 였으나 1593년 봄 전염병으로 부모와 형제자매 5인 등 모두 7명을 한꺼번에 잃은 국담은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고 그의 국 담 추선록에 적고 있다.1597년 국담은 밀양으로 돌아오면서 장례 경비를 마련하여 반장(返葬)을 완수하였다. 이 해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국담은 피란 후 옮겨간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에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산성을 고 수했다. 국담공은 1599년 월성 김씨 교관 김우용의 딸과 혼인을 하고 경 북 대구부 남산에 복거(卜居)하고 병자호란 후 경북 청도 풍각현 에 은거하면서 도학자로서 삶을 살다가 1652년(효종3) 11월 81세 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밀양과 대구부의 사림부터 야로(野老)와 산승(山僧)까지그의죽음을애석해하였다며장례에참석한자가 4,5군(郡)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1672년 (현종13)에 통정 대부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영구히 사당에 위패를 두는 것을 나라 에서허락한부조묘지전(不 튐 廟之典)이내려졌다. 국담선생은아들류,뢰,임삼형제를두었는데장남류는부호군 으로호조참판에추증되었고,차남뢰는좌승지에추증,삼남임은 대호군으로이들은국담종중으로세계를잇고있다. 국담공의 차남 뢰의 아들 성징(聖徵)의 호는 기재(耆齋), 가선 대부중추부사이고,그의아들동고만와양형제는밀성대군후최 초의대동보인신유대보를만들어세상에내놓았다. 동고(東皐) 선생의 휘(諱)는 윤현(胤玄)이고,만와(晩臥) 선생 의휘는윤광(胤光)으로아버지의휘(諱)는 성징(聖徵)으로嘉善 大夫同知中樞府事와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광산이씨의 3남과 4 남으로경북청도달구벌남산에서숙종22년(1696년)과24년(1698 년)에 밀성대군 휘 언침(彦 )의 27세손으로 태어났다. 형제는 밀성인(密城人)으로 大君之后密城朴氏聯系大譜가 없어 각 문중 에서 가첩(家牒)에 의해 혈통의 미미(微微)한 행적(行績)이 전해 오는 것을 한탄(恨歎) 해 오다 신유년(辛酉,1741)에 선생 형제의 주창으로 집안의 세붕(世鵬), 치문(致文), 필정(弼正) 等과 합심 하여 전국 각 문중에 산재해 있던 족보를 수집하여 대소가(大小 家)를 소목(昭穆)으로 정리배열(整理配列)하여 밀성박씨12중조 세계분파지도를 완성하고 12중조파를 구분하여 밀성박씨연계대 보 전(全)30권을 발간하여 각파에 소장하게 하여 이 보첩을 기준 으로각파에서파보(派譜)도발행하게되었다.그리고 양선생은 신라시조대왕의숭성비를세우는데도앞장서지금의숭덕전앞에 숭성비를 세우고, 위판에 왕(王) 자(字)를 삽입하는데도 많은 일 가분들과함께상소하여이를관철시켰다. 무진재공(휘신)의삼남으로국담의아우인휘득춘(得春)의호 는죽담(竹潭)으로효행과학행이저명하였다. 죽담공(휘득춘)의아들종(琮)은도학을강마하는데스스로즐 거움을 찾아, 선원전(璿源殿, 창덕궁에 있는, 역대 임금과 왕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 참봉을 지내고 통훈대부에 추증되었는데 이사실이밀주지에전한다. 감찰공(휘 종지)의 셋째 영달(英達)은 문과 군수이고, 아들 장 환(長桓)은 통덕랑, 손자 상손(祥孫)의 호는 사재(思齋) 효행과 문행으로이름을떨쳤고,아들검(儉),종(宗),발(勃)삼형제를두 었는데장남검(儉)은딸하나를두었고,차남종(宗)은무과에급 제하여전력교위,삼남발(勃)은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추증되 었다. 사미정공의 15대손 광택(光澤)의 호는 소성(小城)으로 시조왕 릉 참봉을 지냈다.학문에 뛰어나 많은 제자를 양성한 소와처사공 (素窩處士公, 휘 炳孝)과 인동 장씨(仁同張氏)와의 사이에 3형제 중장남으로지금의대구광역시달서구신당동에서1901년태어났 다.신학문 대신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전통 유교사상을 이 어받은 그는 한의서를 탐독(耽讀)하고 연구하여 한의사(儒醫)가 되어대구의달성,고령군일대에서신망이높은명의로밤이건새 벽이건아픈환자가있으면주저하지않고왕진을하고십리,이십 리원근을따지지않고환자를보살피고,약값또한주면받고생활 이 어려우면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약재상에서는 절대로 깎지 않았고한다.이는사람을살리는약재값을깎을수없다는것으로 ‘신용과양심’은한결같은선생의신조였다. 선생이 태어난 대구 신당동에 밀성박씨 문중이 이거하여 정착 한 것은 영조 중반 1700년 후반으로달성구지에서이거하였다.예 부터 이곳은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나 메마른 곳이라 시집가 면고생한다며부모들이딸을시집보내기꺼려한동네이다.또‘이 고장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못 먹고 간 다.’는속담을보더라도먹고살기어렵다는것을알수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근근이 목숨을 연 명한 어두운 시절 선생은 인술로서 목숨을 구하고 한편으로는 가 난을털어내기위한방책으로사재를털어저수지(이곡지)를확장 축조해배고품을이겨내게 하여그 공적을 기념하기위해 주민들 은 1944년 이곡지에 ‘이곡지수리계장 박광택 기념비’를 세워 선생 을기렸다. 찬성사공의 차남 시용(時庸)은 문과에 올라 교리를 지냈고, 대 제학에 추증되었는데 후사의 기록이 없다. 삼남 시예(時乂)의 자 는 덕부(德夫) 호는 돈와(遯窩)이다. 조선 태종조에 문과에 급제 하여 청송부사를 지내고 절의가 고상하여 스스로 고향 송악에 은 거하며경서를탐구하며여생을보냈다. 돈와공은아들개주(介柱),원주(圓柱),말주(末柱),몽주(夢柱) 사형제를두었는데장자개주(介柱)는어렸을적부터문장이뛰어 나두아우모두문과에등제하였다.승문원정자를지냈고,차남원 주(圓柱) 또한 승문원정자이다. 장자 개주(介柱)의 아들 효원은 성균 진사이고,손자 귀원(龜元)은 생원시에 합격 후 문과에 올라 사헌부감찰,칠원현감을지냈으며,점필재김종직,한원당김굉필, 일두정여창등과도의지교를맺었다. 돈와공의삼남말주(末柱)는세종조에등제하여승문원정자이 고 그의 차남 세생(世生)은 문종조에 병조참판,세생의 아들 원손 (元孫)은통훈대부어해장군홍문관대제학을지내고삼척시건지 동에 이거하였다, 원손의 동생 헌손(憲孫)은 전력부위이다. 원손 의 아들 성필은 중훈대부 보공장군, 손자 연해(連楷)는 가선대부 절충장군등무신가문을형성했다. 이조참판공은도은공의차자휘신경(臣敬)이다.조상들의풍도 와 업적을 이었고,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조정의 정사가 어지러 움이 드러나고 세상일이 나날이 그릇되어 감에 분연히 벼슬을 버 리고 화왕산으로 들어가 경서를 즐겼는데 그 기록이 동국문헌록 (東國文獻錄) 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 밀양구읍지, 국담추선록 에 전해진다.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휘 후성(厚成)은 참봉으로 무과에 올라 중군부사직을 지냈다. 차남 처인(處仁)은 진사시에 올라음직으로참봉을지냈다. 부사직공(휘 후성)의 장자 인신(麟信)은 세조 병자년(1456) 진 사,1460년 문과에 올라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손자 경의(慶義)는 점필재선생등여려현인들과함께학전을설치하였고,그의아들 천민(天敏)의 호는 월암(月巖)으로 성균진사이다.월암공의 아들 승장(承章)은 생원, 생원공의 장자 봉(鳳)의 호는 봉휴(鳳休) 또 는효돈재처사(孝敦齋處士)로학문이깊은처사이다. 아들희생(希生)의 호는월천(月川)으로 참봉을지냈으며문행 (文行)의뛰어남이동국문헌록에올라있다. 월천공(휘 희생)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는 경수(景邃), 차 자는경인(景仁),셋째는경의(景義)인데모두가뛰어난학문으로 이름을드높였다. 장자 경수(景邃)의 호는 쌍괴당(雙槐堂),거창군(居昌郡)의 학 관(學官)과 영덕군(盈德郡)의 학관(學官)을 지냈다.소년 시절부 터박재(璞齋)김뉴(金紐)<※각주=점필재김종직(金宗直,1431~1492)선 생의손자로호가박재(璞齋)임.송계(松溪)신계성(申季誠)선생의문인으로븮박재 집(璞齋集)븯을남겼다.>선생문하(門下)에나아가따랐다. 븮박재집(璞齋集)븯에“옛집이서로가까워소년시절부터서로두 터운 관계였는데,도의(道義)의 정분(情分)이 이 박경수(朴景邃) 븡경인(景仁)형제와견줄사람이없었다.”고기록하고있다. (박재선생이 박경수에게) 지어준 시(詩)에 “고향 뜰에서 동쪽 을보면길은구불구불한데,지나간일여러가지취한꿈속에섞여 있네.오(吳)나라산(吳岫)에학(鶴)이돌아오니소나무사이달은 싸늘하고, 초(楚)나라 강(江)에 용(龍)이 사라지니 물 위의 구름 은 차갑네.우령산(牛齡山) 계곡(牛谿)의 연기 낀 경치 누가 마음 쓰는지아는가?거북골(龜谷)의꽃향기는이미사라진듯하네.어 찌하면쌍괴당마루에다시모여서한동이술로맑은즐거움을다 시 이어갈 수 있을까?”라고 했다.이 시 외에 지어준 시 3수(首)가 븮박재집븯에 실려 있는데, 이 시들은 “처음 밀양(密陽)의 학관(學 官)으로 부임하면서 박경수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겸하여 여러 일 가들에게 보인다(初到密陽學官贈朴景邃兼示諸族)”와 “거창(居 昌) 침류정(枕流亭) 판상(板上)의 운(韻)에 따라 시를 지어 교관 (敎官) 박경수(朴景邃)에게 보이다(次居昌枕流亭板上韻示敎官 朴景邃)”,그리고“두조카와박경수박정완(朴廷琬)을반룡사(盤 龍寺) 가는 길에서 만나 우연히 읊다(與二猶子及朴景邃朴廷琬盤 龍寺路中偶吟)”가그것이다. 박재의두 조카는(점필재선생의증손자인)김천서(金天瑞)와 김천상(金天祥) 형제이고, 박정완(朴廷琬)은 호를 양죽당(養竹 堂)이라 하는데 고령(高靈)의 도진(桃津) 사람이다. 인조(仁祖) 때에 이 양죽당 집안과 점필재 선생의 외손자 집안이 화(禍)를 입 었는데<※각주=광해군을다시복위시키는계획을하다발각되어송계선생의 외손서인양죽당박정완의후손과점필재선생의큰외손자유수원(柳洙元)의후 손들이처형된사건이있었다>,이들송계선생의학맥(學脈)이수난(受 難)을당할때우리집안도연루(連累)되어이름을바꾸고자취를 숨긴지몇백년이된까닭으로근거할자료를잃어버린지오래였 다. 다만 박울산(朴鬱山)의 박씨들이 번성했다는 이야기와 3형제 가 각기 천석꾼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 근래에 박사(博 士) 병련(丙鍊)이 창녕(昌寧)의 향안(鄕案)에서 선조(先祖) 휘 (諱) 대형(大亨)의 본명(本名)이 경의(景義)임을 확인했는데, 이 전의 족보에 ‘그 형에 경인(景仁)이란 분이 있다.’고 했고,븮박재집 븯의 주기(注記)에 “경인(景仁)은 즉 경수(景邃)의 아우다(景仁 폈 景邃之弟也).”라고기록되어있다. 뱚▶7면으로계속 모헌박양춘선생여포비 국담재전경,후원에부조묘가있다.(밀양비부북면후사 포리) 밀성재앞에동고만와양선생기적비를세웠다.(20 19년) 경소재,경북 고령군다산면좌학리(사미정공의14대손소와처사공齋舍) 뱚△이조참판공파(창녕광산재문중) 광산재,경남창녕군고암광산길22-3:이조참판공의재사(齋舍)이다. 이조참판휘신경이하 선조제단,광산재후원에있다. 뱚▶다음호로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