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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8월31일 일요일 7 (제224호) 특 집 숙인 귀화박씨(歸化朴氏)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효순(孝順)은 종사랑이다. 손자 수견(守堅)의 호는 모선재(慕先 齋)이다.효성이지극하여효행으로참봉에여러차례불렀으나과 거에뜻을두지않았기에위기지학(爲己之學)에힘썼을뿐나아가 지않았다. 천성이 순효(純孝)하고 문사(文詞)가 조달(早達)하여 세인(世 人)을 놀라게 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인으로 학행 (學行)이 높았다. 중종3년(1508)에 모친상을 당하여 구령산(龜齡 山-현모선산)에안장했는데묘옆에초막으로시묘실(侍墓室)을 지어 조석곡전(朝夕哭奠)을 초상시와 같이하고 3년 상을 마친 후 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모선정(慕先亭)이라 편액(扁額) 하여기거(寄居)하시며날마다묘역을청소하고성묘하는것을일 과로 삼아 종신토록 영모지소(永慕之所)로 정하여 세상의 영욕 (榮慾)을 잊고 수학지도(修學之道)에 전념하셨다. 이에 부관(府 官)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올렸던바 참봉(參奉)직을 수 차 내렸으나 끝내 사절하고 여생을 마쳤다.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부근의 산천방리(山川坊 里)를모선(慕先)이라이름한것이지금까지도불러지고있다. 모선재공은 부인 영산신씨와의 사이에 아들 환( 蔣 )과, 만서(萬 緖)형제를두었는데장남환은어려서부터영특하여가훈을계승 해 오직 인친(仁親)을 행실의 근본으로 삼았고 무과에 급제했다. 통훈대부에 올랐으며 현감을 지냈다. 그의 아들 승륜(承綸)은 지 극히착한행실과좋은덕행이있었고,가훈의법도를잘준수했으 며.일찍이 성균관에 유학해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다고 전해지며. 음보로 종사랑이 되었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승윤 의 장남 이겸(以謙)은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 타고 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여 모든 이의사표(師表)가되었으며.거상(居喪)함에지극히슬픔을다했 고,상제를한결같이예법과절도를따르니사람들이이분이사는 곳을 이름 하여 효자리라 하며 숭상하였는데 애석하게도 단명하 셨다. 차남 이눌(以訥)은 임진왜란 때 고아가 된 조카 범(範)과 아들 지(지)를 데리고 영산 창암산과 덕대산 원당골로 피신했다. 전란 후종가는신기로이거했고,공은지척의백산에터를잡아종가를 보존하고 양가의 화목을 이끌었다. 역경의 전란을 이겨낸 공으로 중추부사에추증되었다.부인김해김씨와의사이에아들지( 퐝 )를 낳았는데字는화보(和甫)호가안분당(安分堂)으로임진왜란후 에학사(學舍)가무너져황폐하자중수하는것을자신의책임으로 삼아 밀양향교와 예림서원, 창녕의 관산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을 건축했는데모두이분이창건하였다.이일은예조의원우록(院宇 錄)에기록되어전해진다. 참의공(휘 이겸)은 아들 범(範), 훈(勳)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범(範)은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단정했으며, 성장해서는 군공(軍 功)이 있어 양대(兩代)에 벼슬이 추증되었다. 아들 문경(文經)과 문도(文道)를두었는데장남문경은은인자중하며의(義)를행하 였는데당시사우(士友)들이추앙했으며성품이돈후하며빈틈없 고세밀하여조경암장문익(蔣文益)선생이특히애지중지하였다 한다.차남문도는학생이다. 문경은 아들 의중(宜中), 시중(時中)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의 중은총명하여어릴 적부터학문이뛰어나 동료들도그를높이칭 송했고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에 올랐으며. 차남 시중도 학행이뛰어나난형난제라했었다고전해진다. 부사과공(휘 의중)은 아들 운익(雲翼), 운핵(雲 ), 운흥(雲 興), 운오(雲五),운경(雲慶), 운홍(雲鴻), 운취(雲就), 운득(雲得) 등8형제를두면서크게번성하였다. 장남운익(雲翼)은어려서부터영특했고,스승에게나아가서는 배움에 전력을 다해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에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또 인륜이 독실하여 어버이를 모시고 형제간에 우 애롭게 지낸 까닭에 마을에서 크게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요절하 고 말았다.아들 증엽(增曄)은 6세에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이에 조부부사과공(휘의중)이기특하게여겨“우리집을크게할아이 일 것이다.‘라 했다. 10세 때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일찍 고아가 되어조부모를모시는데온정성을다했다.향시에여러번합격했 으나어머니별세이후뜻을접고덕계정사(德溪精舍)를짓고서동 생들과 성리학을 탐구하고 원근의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과 풍류 를강마하였으며.강좌권만(1688~1749),죽포 손사익(1711~1794), 자운 이의한(1692~1766)등 학우들이 기쁜 마음으로 공을 한껏 추 켜세웠다. 아들 함( ), 인( 篒 ), 섭(燮) 삼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가학에 충실했다.특히 장남 함은 타고난 성품이 인후하고 가정의 교훈을 잘 이어받아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지런히 학문탐구 에힘을써사우(士友)들이집에넘쳤다.가난한자를보면자기일 처럼 여겨 성심껏 도왔다.부사과공의 삼남 운흥(雲興)은 숙부 시 중(時中)의뒤를이었다. 참의공(휘이겸)의차남훈(勳)은밀양에서경기도가평군조종 면 신상리로 이거 하였고.그의 손자 득중(得中)은 가선대부에 제 수 되었으며, 증손 초상(楚尙)은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의 품 계를 지녔다.초상의 아들 두필(斗弼)또한 가선대부에 올랐고 장 남오근(五根)은통덕랑,차남성근(聖根)은통훈대부로군기시정 (軍器寺正)을역임하였다 모선재(휘 수견)의 차남 만서(萬緖)의 아들 윤연(閏連)의 호는 삼성재(三省齋)인데 밀양에서 성주군 대가면 삼산리로 이거했으 며,문장이뛰어나유고를남겼다. 삼성재공(휘윤연)의증손성구(聖九)는국포(菊圃)공태우(泰 佑)의동생으로호는학포(學圃)형제모두학문에뛰어나동생학 포공은 고령현감을 지냈다. 학포공의 아들 세영(世榮)의 자는 치 화(致和), 호는 난고(蘭皐)이다. 효심은 탁월하여 여러 차례 추천 되었다.문장과 서예 필체가 뛰어나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손자 동로(東魯)의호는용암(龍岩)인데본성이순수하고,세상에서배 우고 행동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아 학문으로 세상에 알려져 통정 대부공조참의에추증되었다. 삼성재공의 6대손 효흥(孝興)의 호는 농포(農圃), 통훈대부에 가자되었으며, 아들 동규(東奎), 동명(東明) 형제를 두었는데 장 남동규는성균생원이다. 호군공 휘 계번(季蕃)은 인당공의 셋째아들이다.호군(護軍)을 지냈으며,밀양신촌에서삼가토동 으로 이거했다. 토동 입향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인 숙인(淑 人) 인천이씨(仁川李氏)와 결혼하 면서 처가의 마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씨 문중에는 큰 선 비와 학자가 많아 더불어 여유롭게 놀면서 주고받으며 가히 기예(技 藝)와강론(講論)을이야기하며서 로 성장(成長)하는 장소가 있어 이 미 자기(自己)에게 터득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事物)에게 미침 이 있었던 것이니, 스스로 능히 세 상에 나가서 등용(登用) 됨을 구 (求)할생각이없지않았기때문에 매번경사(京師,한양)에나가종유 (從遊,학식이나 덕행이 높은 사람을 좇아 더불어 사귀고 놂)하며 가히할수있는처지가있을것을도모(圖謀)하였으나,세월이덧 없이 흘러 세월이 나그네의 구름과 객지(客地)의 비속에 없어지 니,후일에 올 미미(微微)한 말단(末端)의 직책은 본래의 뜻을 펼 칠바가아니었다. 사후(死後)에자손이세세(世世)로물려주신규범을 지키며 독 서(讀書)로서 세업(世業)을 삼고 밭을 갈고 김을 맴으로서 생업 (生業)을 삼으니 문학(文學)과 행의(行義)에서 가히 고가(古家) 의남은혜택을볼수가있었고,사회에대한책임이나백성으로서 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을 보였고, 임진왜란 에호군공의현손사돈(士敦)과그의아들건갑,곤갑등삼부자가 몸을아끼지않은살신성인의자세로창의하기에이른것이다. 호군공의 아들 수(琇)는 수의부위, 손자 생화(生華)는 어모장 군,증손유(愉)는선무랑이다. 선무랑공은 아들 사돈(士敦)과 사염(仕廉),사욱(仕勖)삼형제 를낳았는데장남사돈(士敦)은통덕랑으로임진왜란에아들과함 께창의했다. 1592년 임진왜란에 환갑의 나이를 돌보지 않고 아들 건갑,곤갑 형제와 삼부자가 합심하여 가동(家 뚝,집안의 사내종)과 촌정(村 丁)을 동원하여 의병(義兵)을 모아 향토(鄕土)를 지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그는아들형제의자문(諮問)과지도(指導)에힘쓰는 한편 모병(募兵)등 후방에서의 군수보급 활동을 비롯한 의병(義 兵)의 뒷바라지로 적(敵)을 물리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던 것이 다.난후(亂後)에는 뇌용정(雷龍亭,남명 조식선생이 학문에열중 하며 제자를 가르친 곳)을 중심으로 벗들과 교우강마(校友講磨) 하며 흐트러진 민심(民心) 수습에 힘을 쓰다가 졸하였으나 그 해 는미상(未詳)이다. 1832년(순조32)부터 1903년(고종 광무7)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영남유사(嶺南儒士)100여명이연서(連書)로박씨삼부자의충절 (忠節)을 현(顯)하고 정려(旌閭)의 소(疎)를 올렸으나 망국(亡 國)의국치(國恥)와함께그뜻을이루지못하고그때의기록은현 재종손과문중에의해보관(保管)전해지고있다. 통덕랑공휘사돈(士敦)의장자건갑(乾甲)은1558년향리인토 동에서태어났다.자(字)는 응무(應茂),호(號)는우졸재(愚拙齋) 라 하였다. 그는 자라서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선생의 문하 (門下)에서 학덕(學德)을 닦으 니 기개(氣槪) 웅대(雄大)하고 문장이 분명하고 자세하여 주위 (周圍)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 다.선조임진년에바다건너왜적 이침공하여나라의운세가백척 간두(百尺竿頭)에 놓이자 그는 타고난 기개(氣槪)와 애국(愛 國)하는마음과부(父)와스승의 뜻을 받아 아우인 곤갑(坤甲)과 함께 가동(家 뚝)을 동원하고 촌 정(村丁)을 모아 창의(倡義)에 동참하였다. 의병장 곽재우와 지역을 분담 하여 적(敵)을 막으니 정진에서 신번까지의 상하 60리를 맡고 의 령군은 현풍(玄風), 창녕(昌寧), 영산(靈山)을 맡아 지킨 것이다.그는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나절대자기의공(功)을내세우지않았다. 난후(亂後)에는 다시 학구(學究)에 정진하여 소과에 급제하고 성균생원이 되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응천일록(凝川日錄)에 그는 스승 내암(來庵)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하기 위하여 소(疎)를올렸다가유배되기도하였으며후에는내암의잔당으로 지목되어고초를겪기도하였다.또그와동문수학한유경갑(劉敬 甲), 형효갑(邢孝甲) 등의 3인이 몸을 돌보지 않고 열성적(熱誠 的)으로그들의스승인내암을위하여보호하려고애를쓴이름에 갑(甲)이드는세사람이라하여삼갑(三甲)으로불리었다한다. 통덕랑공의 차남곤갑(坤甲)자는응신(應辛)이며호는묵성재 (默成齋)라 하였다.세보에 의하면 형에 이어 소과 급제하여 성균 생원이되었다고전해진다.임진왜란이일어나자부형(父兄)과함 께창의에동참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등 여러전투에참여하여 왜 적을물리치는데힘을다하였다. 1594년에는 성주목사곽재우가조정의명령으로다시악견산을 수축하게되자이에참가하여그를도왔으니국적(國賊)을물리치 는데는몸을아끼지않고헌신하였던것이다. 우졸재공(휘건갑)의아들규(規)는아우구(矩)와함께생원시 에동방급제하는 등학문이 뛰어나칭송과함게 읍지에전해지고 그의다들중혁(重赫)은문과에올라황산찰방을지냈다. 인당공의 후예는 밀양의 토반이다. 그러나 장남 감찰공(휘 맹 번)이밀양의신촌에서창원사촌(沙村)으로이거했으며.이에장 남계명(繼明)의후손들은창녕과창원등에산재해있고,차남계 은(繼誾)의 후손은 창원 내곡,삼남 계장(繼章)의 후손은 창원 사 화,북면등에집성촌을이룬다.특히사화의운암서원을중심으로 지역 성씨문화를 선도한다. 사남 계어(繼語)의 후손들은 창원 초 계,의령등,오남계손(繼孫)의후손들은임진왜란에통영,고성으 로 이거하면서 소식이 끊어졌으나 그의 일부 후손들은 전남 고흥 으로 이주했다. 전남 고흥 입향은 인당공의 5대손 휘 연성(連盛) 공(公)이임진왜란직후경남고성에서세거지를옮겨온이후400 여년 간 15대에 걸쳐 고흥읍 심방동(尋芳同)과 백련동(白連同)을 비롯하여두원면,과역면,점암면등고흥군의넓은지역과순천등 지에 산재하며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그러나 오랫동안 떨 어져살았기에밀양에서만든족보에누보되었다. 시위공의후손들은구거(舊居)를지키면서맏이아닌맏이로가 승을 이어 왔으며,모선정이소재하는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를 중 심으로 모선재(휘 수견)공이 손자 참판공 휘 승윤(承綸) 아들 이 겸(以謙)과 이눌(以訥)은 참의공과 동지공으로 신호리 신기마을 과신월마을에세거하며선영을받들고있다.그리고참의공휘이 겸의 차남 훈(勳)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신상리로 이주해서 그 의후손들은가평과포천등지에세거하고있다. 모선재공의차남휘만서(萬緖)의아들삼성재공(휘윤연)이성 주군대가면삼산리로이주하면서후손들이성주지역에세거하게 된다.호군공은 부인 숙인(淑人)인천이씨(仁川李氏)와 결혼하면 서처가의마을인 합천의삼가면외토리 토동마을 정착토반으로 자리잡았고,인근의의령등에세거한다. 감모재(感慕齋) 초동면 신호1길42-4 :시위공(휘 중번)의 5대손 휘 이눌(而 訥)과 아들자,손자문영,증손희중의재사이다. 역열재(亦悅齋) 초동면 세월길 56-2:위공(휘 중번)의 5대손 휘 이눌(而訥) 의현손시습당운징과 아들증임 등의齋舍 자영재(紫暎齋)·영모재(永慕齋) 초동면 신월 2길57-28:시습당 운징의 아 우운장(雲章)외齋舍 △호군공파(護軍公派) 호군공 유허비(합천 삼가면 남 명로 97) 사효재(호군공유허비앞) 18 3 2년 합 천 유생 이 상돈 외 3 5명 이 연서하여통덕랑공삼부자의충 렬에대한 보상을청원하는소장 집성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