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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위대하 역사를 기억한다.. 지난 100년, 선열들은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고 만세를 외쳤으며, 임시정부를 세우고, 마침내 독립을 일궈냈다. 100년 전 만세운동의 열풍이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시절, 양산의 3.1만세운동도 실로 치열했다. 수백수천의 군중이 목놓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무수한 인원이 일본경찰의 총칼에 목숨을 잃었다. 양산이 3.1만세운동은 모두 세 차례 일어났으며 경남지역 첫 만세운동이 바로 이곳, 신평장터에서 시작되었다. 통도사 승려와 학생들이 주도한 신명평세운동은 통도사 만세운동이라고 불리며, 만해 한용운 스님의 전략으로 시작해 오택언 스님을 중심으로 진행된 거사이며, 이후 해인사와 표충사 만세운동까지 이끌어 낸 남다른 의미를 지닌 운동이다. 통도사 출신인 오택언 (1897~1970) 스님은 민족대표 33명 가운에 한 명이었던 만해 한용운 스님의 밀명에 따라 백성욱, 김상원, 신상완, 정병헌, 김대용, 김봉신, 김법인 등과 함께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이후 만해스님의 밀지를 품고 3월 5일, 통도사에 도착했다. 통도사 지방학림 학생대표였던 김상문과 통도사 스님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과정을 설명하고 거사를 추진하던 중, 비밀이 누설되어 3월 7일 일본 경찰에게 검거. 보안법 위반으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하지만 김상문을 비롯한 양대웅, 박세문, 이기주, 김진오 스님등 40~50여 명의 학생과 불교강원 학인 승려가 10여명, 통도사 거주 승려 10여명은 예정대로 장날인 3월 13일 신평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신평장터 동쪽 도로에 짚으로 만든 밧줄을 놓고 줄다리기를 준비 중이었는데, 구경꾼들 사이로 열사들이 소리를 지르자 구경꾼들은 신평시장 사방으로 흩어졌고 붉은 띠 모자를 쓴 사람을 따라 이동하며 장터의 사람들은 하나되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이날 일어난 만세운동은 인근 지역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3월 31일, 해인사 만세운동, 4월 4일 표충사 단장 장날 만세운동등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