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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7월31일 목요일 7 (제223호) 기 획 본당은 재호를 영명재(永明齋)라 하고 동재를 장춘재(長春齋) 라 한다. 영세(永世)토록 부쟁(不淨)을 금기(禁忌)하고 심신(心 神)을 깨끗이 하며 선조에게 정성(精誠)을 밝혀 바친다는 곳이요 꽃나무는긴봄과함께꽃피운다는뜻이다. 영명재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짝지붕 와가로 측면에 방이 각 한칸이고 나머지는 대청마루이다. 장춘재는 전면 5칸 측면 2칸의 맛배지붕으로 우측에 방1칸이고 나머지는 강당으로 주로 회의장 소로 이용된다.후원에 속함대군을 비롯한 선세 9位와 후세 6지파 의제단이있다. 출입문은 유원문(由源門)이라 한다. 함양박씨는 천 갈래 일만 가지의 뿌리가 견고하기를 길이 밝히고 긴 봄날과 같이 무성하고 울창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어 밖으로 나타내기를 바라기도 한다 는뜻이다. 함양은신라제54대경명왕의아들속함대군(휘彦信)의식읍지 이기도하다.지문,해륜,금철,우,천우공의5대는전해오나그뒤 의 휘와 대서는 고증할 수 없다.후손인 고려 예부상사 휘 善이 이 곳사금동의화장산밑괘등혈에묻힌후왕조가바뀌고또한여러 차례상란(喪亂)으로상서공의묘소마저실전되었다. 1697년 후손 여현(汝賢, 승명 思屹)과 상보(尙寶)가 거친 등성 이묵은풀속에서작은 비석을발견하고상서공의 묘소임을 확인 하여 여러 종인에게 알리니 첨지중추부사 상욱(尙郁, 1626~1725) 과 의흥현감 기조(起祖,1659~1735),현풍현감 상순(尙淳,1655~17 25)등 여러 종인이 달려와 다시 재 확인 한 뒤에 분묘를 개봉하고 떼를고쳐사초를하고향사를올렸다. 1706년 후손 병조참판 경후(慶後묘, 1644~1706)가 비문을 짓고 앞면의 글자를 쓰고 사헌부지평 내정(乃貞,1644~1735)은 뒷면 글 자를 써 묘소 앞에 비를 세웠다. 1710년경에 예조판서 지재(趾齋) 민진후(閔鎭厚, 1659-1720에 게서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받았으나,종재(宗財)의 부족으로 비 석을세우지못하였다. 영조23(丙寅,1746년)에 전남 영암에 사는 18代孫양신(良藎)이 이 고을(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3일 만에 제수(祭需)를 정제(精 齊)하게갖추어성묘를한후좌우에게묘직(墓直)이가있는지없 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각도 없고 위토도 없어 재직이로 살 사람을정하지못했다하니사군(使君)이슬피탄식하고눈물을머 금으며 즉석에서 돈 20냥(兩)을 내놓고 제각을 지을 계획을 도모 하니 좌우가감격하지않은 이가없었으며각자의 힘에따라 도우 므로 약간의 돈을 수합하고 사군(使君)이 사방을 두루 바라보며 묵은밭한곳을가리키며말하기를뷺이곳이可히마을로들어가는 入口가되겠다.뷻하고친히가서터를둘러본뒤에또한묻기를뷺가 까운곳에사~오칸짜리집을팔고자하는자가없는가?뷻하니좌우 에서 답하기를 뷺있다뷻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값을 석양을 주고 사 들여 성조유사(成造有司)를 차출하니 여순(汝舜)·여준(汝俊)·철 무(哲茂)세사람이었다. 즉각 목수를 부르고 장인에게 명하여 어언 감독을 끝내니 본군 에사는 종인들이 각히 출역을 하여 사칸 전후 퇴접집을 곤좌(坤 坐) 간향(艮向)으로 몇 달이 안 되어 짓고 즉시 묘직이를 정하여 이좋은집에서살게하여조촐하게수호하는역을맡기니뒤에이 소식을들은후손들이앞을다투어정성껏싸가지고온이가190명 이요돈이31량(兩)이되었다. 이에두곳에다제위土5두락을더준비하니종인여문(汝文)도 또한2두락을자납(自納)하였다. 1828년 상서공이 22대손 의화(義和)가 민진후(閔鎭厚)가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안동 김정균(金鼎均 1782-1847)의묘비문을덧붙여신도비를세우고,1841년(憲宗8)에 상서공 25대손 성엽(性燁)이 남산마을 입구 바위 위에 있는 신도 비를마을가운데길가지금의마을회관앞으로이건(移建)하였다. 1870년경에 도유사 원호(源灝 1821-1892 2파24세)가 재실에 처 음으로 영명재의 재호(齋號)를 만들어 붙이다.영명재의 의미는 ' 영원히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하는 뜻을 밝힌다. 영세추모 이명보 본(永世追慕以明報本)하라는뜻이다. 1929년에 임실(任實)에 사는 2파 24세 용만(容万)이 재물을 내 어 영명재를 중건(重建)하여 10월 10일에 용만의 표성비를 세우 다. 1967년3월에영명재를수리하다.1969년3월에영명재뒷등성이 에 5세 인정(仁挺), 신정(信淸), 윤정(允禎), 신유(臣 찮 )와 6지파 파조 지문(之文), 지빈(之彬), 지량(之亮), 지수(之秀), 지온(之 溫), 지영(之潁)을 설단(設壇)하고 단소 담장 혼회벽(渾灰壁) 돌 로 길이 36자, 너비 2.6자, 높이 4자를 쌓아 철문을 만들고, 단소에 단표비(壇表碑,黃嶝石)높이 3자,넓이 1자를 5세 10위에 각각 세 우다. 1969년 4월 일에 영명재의방문20여짝을고치고방6칸과문간 을수리하고,수호인(守護人)山의옛초가주택을헐고기와집3칸 (비용 127,980원)을 새로 짓고,영명재 및 수호인 집에 전등시설비 용13,000원을지급하다. 1974년 음력 10월 초하루 제5대 대종회장에 후손 태술이 취임, 성금을수합하여영명재보수와기와를바꾸다. 1978년 음력 10월 초1일에 제7대 대종회장에 후손 남순(南淳_ 이연임하다.1979년 서울에 사는 후손 남순과 시언이 성금을 모아 영명재 뒷 등성이에 속함대군의 단을 개설하고 상서공 묘표를 복 원하였다. 10위의 단을 고치고 곡장(曲牆)을 쌓았으며 영명재의 보수,숙사(宿舍)신축등대규모종사를시행하고그전말사실을 담아기미종사비를세우다. 1986년 음력 10월 초1일에 제11대 대종회장에 대구에 사는 후손 재을(在乙)이취임,1987년에재을회장이단독으로산청(山淸)가 는 도로에서 재실까지 진입로를 확 포장하였으나 얼마 안되어수 해로인하여 유실또는붕괴 되었으므로재을회장의 회사갑을건 설에서복구공사를시행하였다. 1990년재을 회장이중임하여영명재중건공사를착공하였으나 1991년7월28일영명재중건공사중대종회장재을이급서(急逝) 하여 1992년 후임 동식 회장이 영명재를 준공하니 회의실과 수호 인집까지전체건물의모습이새로워진현재의건물이지어졌다. 2003년 음력 10월 초1일에 제20대 대종회장 성종(聖鍾)이 영명 재뒷등에선조5세의설단을단독으로세웠다. 2009년 음력 10월 1일에 제23대 대종회장 석남(錫南)이 회의실 책상과 의자를 구입하여 비 치하고 상서공 묘역성역화사업을 추 진하기위한성금으로5억원을헌성,9월15일에영명재오른쪽담 밖에 가축사육장을 철거하여 주위환경을 정화하고, 화장실을 양 옥 2칸으로 신축하여 수세식 양변기 4개 설치와 소변기 4개 및 세 면기 2개를 화장실내에 설치하였다. 영명재 협문을 신축하고 7단 의 돌계단을 양회 다짐으로 설치하고 화단을 조성하였고, 2011년 음력 10월 초1일에 제24대 대종회장에 후손 석남錫南이 연임하여 4월 5일에 영명재 유원문 앞 계단 밑 좌우 쪽에 원형 석탑 2개를 쌓 고, 주목(朱木) 2주를 심어 화단을 조경하고 영명재 앞 작은 시내 의양쪽기슭40여m를돌로쌓았다. 2012년 6월 16일에 상서공 묘역 성역화사업을 시작하여 묘소로 오르는길언덕을돌로쌓고묘소의통행로에박석을깔고,석탑조 경과 상수도관을 설비하고 유천을 준설하여 정리하고 표지석(表 識石)을 세우고, 7월 29일에 영명재 통행로를 확포장사업과 주차 장개설 기실비(紀實碑)를 영명재 통행로 곁에 세웠다. 묘역 진입 로는자연석을바닥에 깔고잔디를입혀멀리보이는 묘역까지걸 어가 보고 싶도록 자연 친환경적으로 설계 시공한 산책로로 누구 든참배하고 쉴 수있는 아름다운공간으로서의면모를일신하였 다.그리고성역화사업에동참한천여명의후손들이8억여원의성 금모금한 사실을 헌성비에 새겨 헌성한 종원들의 고귀한 정성을 기리고있다. 함양박씨의 뿌리는 신라 경명왕 때 팔공자의 한 분인 속함대군 휘諱언신(彦信)이다.대군이속함(速含)에봉군(封君)되어속함 을 식읍(食邑)으로 자손이 세거함으로서 속함을 관향(貫鄕)으로 했으니 속함은 함양박씨의 발상지이다. 속함은 함양(咸陽)의 옛 이름이니, 삼국 때에는 속함현(速含縣, 含城)이라 하였고 통일신 라 때에는 천령군(天嶺郡)이라 하였으며 고려 때에는 함양현(含 陽縣)이라 하다가 조선 때에 함양군(咸陽郡)으로 고쳤으므로 함 양박씨를 함양후인(咸陽后人) 혹은 천령후인(天嶺后人)이라 한 다. 대군의 후손으로 븮구보븯(舊譜)에 후손 지문(地文:吏部尙書), 아 우 지황(地皇:禮部尙書), 지원(地元:朝請大夫)이 있고, 아들 해륜 (海倫:工曹典書), 해해륜의 아들 우(禹:鍾正·太傅), 아들 천우(天 禹,樞密)아우천상(天常,右僕射)·천일(天日,檢校))의휘를실었 으나세대가상세하지않아상서공휘선을1세로하여수보(修譜) 하고있다. 함양박씨의 중시조(中始祖)상서공 선(善)은 고려 중기인 1100 년경인 선종(宣宗, 13)대에서 의종(毅宗, 18대) 대에 생존하신 분 이다. 벼슬은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지 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추증되었다. 묘소는 경상남도 함양군 남산리(南山里) 사금동(賜琴洞) 갑좌 (甲坐)에있는데,중년(中年)에실전(失傳)했다가조선1697년(숙 종29)에 스님 사흘(思屹, 族譜名 汝賢, 2파20세)이 그곳 풀숲에서 작은 비석을 발견하여 종인들에게 알림으로서 첨지중추부사(僉 知中樞府事) 상욱(尙郁, 4파20세), 의흥현감(義興縣監) 기조(起 祖,4파19세),현풍현감(玄風縣監)상순(尙淳)이합의하여묘소를 개봉하였다. 묘소를 찾은 9년 뒤인 1706년에 상욱의 아들 참판 경후(慶後, 4 파21세)가묘표(墓表)를지어묘비(墓碑)를세웠고,1828년(純祖2 8)에진사의화(義和,4파23세)가신도비(神道碑)를세웠다. 전하는말에의하면,함양박씨상서공과함양오씨(咸陽吳氏)시 조 광휘(光輝,尙書右僕射),함양여씨(咸陽呂氏)중조 임청(林淸, 將軍) 여흥민씨(驪興閔氏)의 삼동서였는데, 세분이 자연에 소요 (逍遙)하며 쉬어간 곳을 삼휴대(三休臺)읍에서 서북쪽 10리쯤에 있는 지금의 삼사동(三師洞)이라 하고,갓을 걸어 놓고 쉬어간 마 을을갓걸이,괘관(掛冠:南原쪽고개아래)이라하여지금도지명 이남아서불린다. 상서공의묘소는군청남쪽5리쯤에있고,여장군묘소는상서공 묘소에서진주(晋州)쪽으로10리쯤에있고,오상서묘소는여장 군묘소에서또10리쯤인유림면회동에있다. 함양오씨 측에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오상서가 지리에 밝아 우리 상서공이 먼저 하세(下世)함에 자신의 묘지로 잡았던 옥등괘벽형(玉燈掛壁形)을양보하였고,또오장군이작고함에노 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자신의 묘 자리를 물려 주였고, 자신은 또다시택지(宅地)하여들어간곳이화예혈(花蘂穴)이라한다.삼 동서(三同壻)의차례는오상서가맏이이며여장군이가운데이며, 우리 상서공이 셋째라 하는데, 븮동국여지승람븯 븮함양븯 성씨항에는 여(呂)븡 오(吳)븡 박(朴)의 순 서로되어있다. 2세 휘 인정(仁挺)은 문과에 급제하여 조청대 부(朝請大夫) 예부상서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에추증(追贈)되었다. 3세 휘 신청(信淸)은 문과에 급제하여 조청대 부 예부상서 검교(檢校 신호위(神號衛) 무덕장 군(武德將軍)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 사에추증되었다. 족보에 배위는 군부인 김씨이니 낙랑공(樂浪 公) 정(挺)의 따님이라 했다. 이 부분은 구당공 (九堂公) 종손 규순(奎淳)의 집에 있는 븮보유록 븯(補遺錄)에있는데,작은글씨로븮신라경순왕김부가고려에항복 하자,고려가낙랑공주로처를삼고낙랑왕에봉하였다.고려말신 우 시대에 이르러 낙랑을 경주의 별호로 삼았으니 김부의 후예인 것 같다.(新羅敬順王金溥 降麗 麗妻以樂浪公主 封樂浪王 至麗末 辛禑之世 以樂浪爲慶州別號 樂浪金氏 似是之後)븯라 했는데,고려 태조가 경순왕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낙랑왕으로 봉하여 경주를 식읍으로삼게함은역사서에나오는바이다. 븮경주지븯(慶州誌)나 븮한국지명연혁고븯(韓國地名沿革考)에 경 주의 옛 이름을 낙랑이라 하고, 고려 목종(穆宗) 11년에 경주를 강등하여 낙랑군을 삼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낙랑이 틀림없는 지 명이다. 배위의 관향은 낙랑 김씨이며, 지금의 경주 김씨임에 틀 림없다. 4세 휘 윤정(允禎)은 문과에 급제하여 은청광록대부 판호부상 서(判戶部尙書) 태부경(太府卿)을 지내고 치사(致仕)하니, 금자 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추증되었 다. 5세 휘 신유(臣찮 )는 첫 이름이 신보(臣寶)였다.문과에 급제하 여 은청광록대부 이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지내고 응천군(凝川君) 에 봉해졌다.금자광록 상주국(上柱國)판삼사사(判三司事)에 추 증되었고시호는충질(忠質)이다. 이제현(李齊賢)의븮역옹패설븯에응천군(凝川君)의무용담이다 음과같이실려있다. 고려 고종(高宗) 24년 1237에 이연년(李延年)이 호남(湖南)에 서 반역을 일으켜 율원(栗原)·담양(潭陽)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 를 끌어 모아 이가당(李家黨)이라 이름하고 군현을 공략했는데, 전라도지휘사 김경손(金慶孫)이 나주(羅州)에서 포위되어 성이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그 때 응천군(凝川君)이 약년(弱年)에 참전하여 앞장서서 싸우는데 적진에 효용(梟勇한 중놈이 여러 군 사들에게맹세하기를뷺내저미소년을잡아등에매고돌아오리라. 뷻하고휘파람을불며뛰어들었다.응천군이또한용감히맞서싸워 격전끝에그중놈을걷어차서넘어뜨려목을베니적들이경악(驚 愕)하여달아나니수십리를뒤쫓아사투끝에이연년의머리를베 고난리를평정한것으로기록되어있다. 함양박씨는 응천군의 아들인 6세에서 6파로 갈리어 문중의 기 틀을 확실하게 잡는다. 븮지븯(之)자 항렬로 인해 븮육지파븯(六之派) 불린다. △1파의 파조 휘 지문(之文)은 품계가 사림랑(詞林郞)이며 벼 슬은군기소감(軍器少監)으로군기소감파라한다. △2파의 파조 휘 지빈(之彬)은 문과에 급제하여 조청대부 위위 윤(衛尉尹)을지내고문원(文元)의시호가내려져문원공파라한 다. △3파의 파조 휘 지량(之亮)은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판삼사사를지어행직(行職)으로최고관직을누린분으로판삼사 사파라한다. 븮고려사븯에 의하면, 1270년 元宗12 2월에 수로방호사(水路防護 使)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경상도로 간 기록 이 보이고,충렬왕 즉 위년 10월에 여원(麗元)연합군의 일본정벌에 도독사(都督使)김 방경의 휘하에서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출정하여 일기도에서 적 천여급(級)을베하고,6년11월에상장군(上將軍),12월에원나라 로부터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군천호(管軍千戶)의 벼슬에 금패 (金牌)와 인(印)을 하사받고, 13년 정월에 부지밀직사사(副知密 直司事), 6월에 좌익만호(左翼萬戶)로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7 월에 군사 1천을 거느리고 동쪽 변방에서 여진족을 막고,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승진하였고,15년정월에원나라에서만호 (萬戶)븡천호(千戶)·백호(百戶)에게 금은패(金銀牌)와 쌍주(雙 珠)를 하사했는데 금패(金牌)를 4분하여 공을 비롯 라유(羅裕)· 한희유(韓希愈)·장순룡(張舜龍)에게 나누어 주었고, 4월에 동북 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15년 3월 경상 전라 도순문사(都巡問 使),6월에원제(元帝)생일축하사절(祝賀使節)로원나라에사신 으로갔으며,16년2월에좌군만호(左軍萬戶)로거란족를막고,12 92년(元宗18)4월1일에졸하였다. △4파의 파조 휘 지수(之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충렬왕때 통헌 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비의어대( 衣魚 帶)를받았다.밀직부사공파라한다. △5파의 파조휘 지온(之溫)은문과에 급제하여감찰어사(監察 御使)를지내감찰어사공파라한다. △6파의 파조 휘 지영(之潁)은 진사로 금오위중랑장(金吾衛中 郞將)을지내중랑장공파라한다. 속함대군의 단비 전면 글씨는 윤보선 대통령이 썼다.아마도 윤 대통령은함양박씨가문과의특별한인연이있는듯4파의선산인 경기도고양시오금동선영입구표지석글씨도있다.그리고영명 재는함양박씨의자부심이다. 1746년 최초 건립이후 수차례 보수를 하였고, 1990년 중수공사 를 시작 1992년 현재의 건물이 들어선 이후 많은 종원들의 헌성과 울력이있었음을알수있다.당시용연사업이사는사업이마무리 될때까지 상주하였고, 삼섭 총무이사와 기홍 재무이사는 서울에 서함양까지주수회오가며현장을지휘했다.이는오직숭조심에 서비롯된위선(爲先)정신의발로(發露)인것이다. 특히제23~4대회장을역임한박석남(우진사료회장)회장의헌 신적인 공로는 잊을 수 없다. 공식적으로 출연한 헌성금이 대략 6 억여원 정도이고 밑에서 일하는 임원들의 경비와 격려금을 포함 한금액만도수억원이다. 박 회장의 노력은 1천 여 명의 종원들의 동참을 이끌었고,항상 웃으며 뷺종중에 돈을 쓰니 사업이 더 잘된다뷻는 웃음 섞인 농담은 이제어록(語錄)으로기록되어전해지고있다. 뱚재실탐방 함양박씨영명재 <경남함양군함양읍이은리> 영명재는함양박씨의대표재실이다.후원에속함대군의 제단을 비롯 상조 제단이 있고 건너편에 중시조 상서공 (휘선)의묘역이있어매년음력10월1일재향하는재숙 소이기도하다. 1746년최초건립이후1990년중건을착공하여1992년준 공에이르기까지,또2012년부터추진한주변정화사업과 상서공묘역 정비사업에는 1천여명에 가까운 종원들이 동참4억여원을모금하고당시박석남회장이사재5억 여원을 헌성하면서 영명재 주변을 공원화 하였다.이에 전국의많은 성손들이 찾은 성지순례 코스로 각광받고 있으며,이처럼지역의명소가되기까지는후손들의피나 는노력이있었음을알수있다. 그리고지난7일박씨대구연합회(회장도규)임원진또한 이곳영명재를찾았기에소개해본다. 영명재전경,후원에속함대군을비롯한단소가있다. 영명재구성 영명재본당 영명재연혁 상서공 묘역아래 유천을 복원하고 탐방객들의 편의를 위해 음수대를 설치 했다.(사진박석남회장(右)을비롯한 원로분들이 기념촬영을하고있다.) 함양박씨약사 매년10월1일이면전국의후손들이 찾아와추원보본의정성을다한다. 맺은말 헌성비, 폭6m 높이 1.5m 대형오석에1천여명의종원들의이름을새겨그 소중한 뜻을기리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