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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1월31일 금요일 7 (제217호) 관향조 종친회 박절사(朴節士) 유는 자(字)가 경배(景培)이고, 대대로 밀주 (密州:밀양)에 살아온 큰 집안 출신으로서 고려시대에 나라를 위 해목숨을바친장군박성진(朴成進)의후손이다. 만력(萬曆)임진년(壬辰年:1592)에왜구가크게쳐들어왔을때 밀주는전란의피해를직접당해매우위급한상황이었다.당시17 세로 아직 미혼이었던 절사는 부친과 함께 산골짜기로 피난하였 다.그러던중부친을봉양하기위해쌀을가지러혼자서인가로나 왔다가 노략질하는 적에게 붙잡혀 적의 진영에 끌려 들어가 목숨 을잃을상황에처하게되었다.그런데왜적우두머리가절사의행 동과용모가걸출함을보고는,절사를칼로상하게하지말되절대 놓치지도 말라고 명령하고이를 어길시 목을치겠다고엄포를 놓 았다.이때문에보초서는자들이더욱경비를엄하게하는바람에 절사는다른포로들과도소통할수없었다. 정유년(丁酉年: 1597)에 적들이 철수하여 돌아갈 때 절사를 배 에 태우고 함께 바다를 건너며,“조선의 진귀한 보화를 얻는 것보 다이사람하나를얻는게더낫다.”라고말했다.적가운데관상을 보는 자가절사의 골격이범상치않음을 보고는반드시국난에 임 하여몸을바칠만한자라고하여,저들이절사를반드시자기네장 군으로삼고자한것이다. 대마도에 도착하자 여러 왜적들이 날마다 유인하여 절사를 자 기들의의도대로맞추려하였다.당시나이20여세로근력이남보 다 월등했던 절사는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서는 한번박차고오르면저바다끝에이르기라도할듯이멀리우리나 라땅을바라보곤하였다. 주변의 감시가 점차 소홀해지자,절사는 몰래 물가에 버려진 삼 나무판을가져다뗏목을만들어바람을타고바다에띄웠다.팔힘 으로뗏목을지탱하며북쪽동래를향해헤엄쳐갔으나,경역을넘 기전에왜적이곧추격해와붙잡혔다.이와같이하기를세번,왜 적우두머리가칼을어루만지며으름장을놓았다. “어찌하여 고생스럽게 도망가려 하는가? 도망가는 놈은 법에 따라죽어야한다.” 그러자절사가서슴지않고대답하였다. “나에게는아버님이계신데그생사조차모른다.살아돌아가지 못할바에는차라리죽어서혼이되어서라도돌아가겠다.” 여러왜적들이웅성대며말하였다. “말하는것이저리도강직하다니!나무판하나를손으로저어창 해에맞서려는것을보니참으로천하의장사로다!잘대우해주는 것이낫겠다.” 마침내함께동북쪽으로물길수천리를가서대판성(大坂城:오 사카)에 도착했다. 이곳은 평수길(平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도인데, 당시 평수길이 죽자 나라 안에 대란이 일어나 가강(家 康:도쿠가와이에야스)과휘원(輝元:모리테루모토)이서로싸움 을벌였으나,우리나라포로는한섬에모아두어그난리에끼어든 자는없었다. 선조 을사년(乙巳年:1605) 봄에 왜적들이 멸절되고 원씨(源氏: 겐지) 정권이 안정되자 우리 조정에서는 승려 유정(惟政: 사명대 사)을 일본으로 보내 포로로 잡힌 남녀 3천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 게 하여,절사는 나이 서른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절사는 기 골이장대하고8척이나되는훤칠한키에호걸스러운기상을지녔 으나,일본에 머무른 9년 동안 저들의 부녀자와 짝을 이루지는 않 았다. 고향에 돌아와서야 부친이 병란 중에 돌 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가슴을치고통곡하며상례를행하여돌이켜최복3년을입 었다. 오랜 훗날 절사는 비분강개의 눈물을 흘리며 어떤 이에게 이렇 게말하였다. “내 어려서 불행히 고래의 굴 속에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이제 다행히도 돌아와 성군(聖君)의 백성이 되어 머리가 희어가고 있 다.내이런때에글과검술을익혀당세에이름을올리지못한다면 어찌사내라칭할수있겠는가?” 곧바로절사는같은마을사람으로벼슬을지낸손기양(孫起陽) 선생을 찾아가 서책 한두 종을 통달하도록배웠고,절도사 김태허 (金太虛)에게 활쏘기를 배웠다. 집에서는 책을 잡고 나가서는 활 을 당겼으며, 잠자리에서나 식사할 때나 걸어 다니면서까지도 입 으로외고손으로익혀,비바람이불든춥거나덥든간에밤낮으로 그치는 때가 없었다.사람들이 혹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 하니 절 사는 이내 웃으며 응대하기를, “남보다 늦게 배우는 자가 촌각을 아끼지 않으면 가는 세월을 어쩌겠습니까?”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대황궁(大黃弓)을 혼자 밟아 시위를 매길 정도로 힘이 세고 말위에서활쏘기를잘하는것으로이름이났다. 절사는 만력 정사년(丁巳年: 1617)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10년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웃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자절사는이렇게말했다.“무신이면서시대가태평한데벼슬 에 나가서 절개를 꺾고 권세 있는 귀족들에게 아첨하여 봉급이나 바란다면부끄럽지않겠는가?”그러다가남북오랑캐의어려움과 우환에이야기가미칠 때면주먹을불끈쥐고머리칼을 쭈뼛세우 고눈물을줄줄흘리며비장함을드러내지않은적이한번도없었 다. 천계(天啓) 7년 정묘년(丁卯年: 1627)에 금나라 오랑캐가 기미 년(己未年:1619)에항복한장수강홍립(姜弘立)을앞장세워크게 쳐들어왔다. 용만(龍灣: 의주)으로부터 동쪽으로 왕의 군대가 번 번이 패하여 우리 인조 임금께서는 강화도로 옮겨가셨다.급히 각 도에서금군(禁軍)을징발하여기일을정해서쪽으로출정하게하 니,각주(州)의도호부(都護府)에서병사를이끌고갈장수한명 씩을차출하였다. 이에절사가소매를걷고일어나빠르게도호부에달려가서“나 라에 어려움이 있으니 저는 스스로 한 부대를 이끌어 선우(單于) 의 기병을 대적하기 원합니다.”라고 청하였다. 부사 여우길(呂祐 吉)이 절사의 말이 뛰어나고 모습이 장하다고 여겨 활과 칼,솜옷 을주었다.이날병사들을먹이는자리에서부사는한말들이술잔 으로 절사에게 술을 권하였다.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절사는 훨 훨날듯일어나춤을추며칼을빼어들고군사들에게맹세하였다. “대장부가 7척의 육신을 가지고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발로 딛 고 살아 가다가 한 번 죽음은 면하지 못하는 법이다.왕의 일에 죽 는 것이 어찌 아녀자의 죽음과 같을 수 있겠는가?”그리고는말을 채찍질하여 서쪽으로 달려가니 부하 군사들이 아무도 감히 뒤처 지지못하고따랐다. 정월 20일 군대가 안주(安州)에 주둔하였다.다음 날 아침 먹기 전에수많은적들이폭풍우처럼갑자기쳐들어왔다.우리군대는 대열을이루지못한채북을울려대니죽은자들이들을덮었으며, 상장군이 전사하자 나머지 무리들도 궤멸하였다. 절사만이 홀로 수하8명의병졸들과함께성책(城柵)에몸을숨긴채병졸로하여 금 화살을 연달아 뽑아 주게 하고 자신은 활을 당겨 적을 쏘니,활 을당기는족족적들이쓰러졌다.절사는평소오른손으로활을당 기는데,상황이 너무 급하여 미처 손에 깍지를 끼지 못했다.이 상 태로 수백발을쏘고나니엄지손가락이터져 피가줄줄 흘러내렸 다.그러자바로왼손으로바꾸어활을당겨적들을무수히쏘아맞 추었다. 이때 적들의 창과화살이 갑자기쏟아지자사람들이모두 새떼 처럼혼비백산했다.수하병졸가운데같은마을사람손운강(孫雲 江)이란자가절사의소매를붙잡고외쳤다. “상황이급합니다.이대로죽는것은쓸데없는일입니다.어쩌시 겠습니까?” 그러자절사가성을내며칼을뽑고말했다. “나는죽음을왔던데로돌아가는것으로여기거늘너는무슨말 을하는것이냐?” 마침내말을달려적을향해힘껏칼을휘두르니,칼빛이번개처 럼 번쩍였다.동서로 달려드는 적들과 부딪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다해창을맞고죽었다.절사가말을타고싸우는동안손운강은이 미무기를끌고백보밖으로도망갔는데,절사가말에서떨어져죽 은 곳을돌아보니적을 꾸짖는소리가여전히 들리는듯하여뼛속 까지서늘하게전율이일었다. 절사가 순국했을때 춘추가 쉰여섯이었고,슬하에 어린 아들 하 나가있었다.손운강이고향으로돌아가홀로남은아들을만나통 곡하고는,정월 21일에 있었던 절사의 의로운 죽음에 대해 그림처 럼생생하게고하였다.이를들은사람들이원근에서모두와서조 문하였다. 또 같은 군의 병사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인 박평남(朴 平男)에게물어보니,그도역시절사의휘하에있던자였는데보고 기억하는것이손운강이말한것과일치하였다. 신생(申生:작가자신)이말한다.예전나의 선친께서젊으실적 에 이웃의 늙은 병졸 손운강을 만나서 아침저녁으로 옛 이야기를 나누셨는데,박 절사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매우 자세하게들으시 고는 전(傳)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래서 매번 손운강에게 들으신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장황하게 설 명하기를 그치지 않으셨다.그래서 나도 아이였을 때 귀에 익숙하 게 들었다. 게다가 나는 3대에 걸쳐 죽리(竹里)에 살았는데, 절사 집안의손자및증손너덧명과친하게지냈다.특히일본에서포로 생활할때의일을듣고는잠을이루지못하고탄식하였다. 박절사의 사람됨은 나면서부터 걸출하였고 천리 밖의 적도 무 서워 돌아갈 만큼의 위용을 지녔다.절사의 기상은 전쟁이라는 난 국에서 증대되었고 그 의리는 나라의 원수를 상대하여 격분하였 다.절사는 넓은 바다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고,서슬 퍼 런칼날도밟을수있는것으로보았으며,승냥이와호랑이같은무 리백만이있어도하루살이에지나지않는것으로보았다.늘의분 을 생각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절사가 하루아침에 나라의 위 급한 상황에대처할 수있었던것은평소에쌓아둔 바가있어서였 다. 명령을 받고 장군을 따라 깊이 들어가 북으로 척박한 한해(瀚 海)땅에 임하였고,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말에 올라 약갈라(藥葛 羅)의진중으로달려가면서추호도두려움이없었다.아아!이야말 로참된장군의모습이아니겠는가! 정묘년의난은강홍립(姜弘立)이대대로권세를누리다가금나 라오랑캐에게예물을바치고투항하고는선우(單于)를교사하여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 전역을 유린한 것이니,이로 인해 수비군 이 줄줄이 바람처럼 쓰러지고 적군의 말방울소리와 먼지가 길에 가득하였다. 오직 절사만이 한미한 가문에서 일어나 비분강개하 며 자원하여 가서 안주의 들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그의 마음에 는벼슬이나녹봉,으리으리한집과수레로가문을경영할뜻이본 래 없었고,죽은 뒤 천 년을 가는 이름을 남길 생각도 없었다.오직 충렬을 다하는 심정만을 가지고 위로 임금과 아버지를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까마귀와 매의 먹이가되는것을스스로달게여겼을뿐이다. 내이에단연코말하건대,국조이래로충신절사중에서이사람 과비교할수있는자는아무도없다.이전쟁에서최몽량(崔夢亮:1 579~1627,의주판관)은 의주에서 죽었고 남이흥(南以興:1576~162 7,영변부사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과 김준(金浚:1582~1627, 안주 목사)은안주에서죽었으나,이들은모두현달한관리로서임금이 주는 녹봉을받아 살고있었으므로임금을 위해목숨을바치는 일 은진실로당연한것이었다.그런데임금께서환궁하신뒤 이 세 신 하에게품계와봉록을높여추증하고그자제들에게도음사(蔭仕) 의 혜택을 내리셨으나,절사는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 죽어가 상벌 을관장하는관리가그의이름조차알지못했다.아아!절사처럼뛰 어난 분이살았을 때에는제대로때를 만나지못했고죽어서 나라 에 목숨을 바쳤는데도나라에서 그를 알아주지 않았으니,이는 타 고난문벌이그를이렇게만든것이로다.절사같은이에게도은혜 가 저승에 미치지 않는다면 나라의 전장제도가 무엇으로 후인을 권면하겠는가? 어떤이는 절사의죽음이병졸 한사람의 말을근거로전해졌을 뿐이니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그 러나예로부터전란으로죽은경우는모두이와비슷하다.오삼(伍 參)의육신이이미진(晉)나라군영에있다면누가그것을보고전 하겠는가?반고(班固)가준계산(浚稽山)의패배를기록하면서한 연년(韓延年)은 전사하고 이능(李陵)은 살아서 흉노에게 투항하 였다고 언급한것은 사실패망한여러 병졸의보고에서취한 것이 다.한유(韓愈)는 수양성의 의사(義士)를 서술하면서 사주(泗州) 의 뱃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근거로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천하 사람들이 이들의영광스러운 이름을 기리고 있으니,전한 말 이 대단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세토록 닳아 없어지지 않음이 이 와같은것이다. 이상과같이박절사전을짓는다. 박절사전(朴節士傳) 신유한(申維翰:1681~1752,호靑泉)作,고려대학교한문과송혁기교수譯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에 속하는 금곡리(金谷里)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의 중앙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희곡리와 접하고 있으며,북쪽과 서쪽에는 엄광리와 다죽리가 있다.동남쪽 에서흐르는단장천은단장면과경계를이룬다. 금곡리 북쪽에 솟은 중산(649.1m)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동리를 감싸고있어동남쪽을제외한사방이산지로둘러싸여있다.본촌, 단산과골안의3개마을로구성되어있다. ▲ 명칭유래 : ‘금곡리’ 지명은 븮호구총수(戶口總數)븯(1789)에 수 록되어 있어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 우리말 이름은 ‘쇠실’로,마을뒤쇠판산(金板山)에서철을채굴한데서비롯되었 다.또한주변경관이뛰어나‘금계(金溪)’라고불렀다고도전한다. 이에부조묘의묘호(廟號)를금계사(錦溪祠)라 하였다. ▲형성 및변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 밀양군 천화산외면금곡리가개설되었다. 1918년 천화산외면이산외면으로개칭되어경상남도밀양군산 외면 금곡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밀양군과 밀양시의 통합에 따라경상남도밀양시산외면금곡리가되었다. 금곡리의 취락은 중산에서 흐르는 계류천이 단장천과 합류한 일대에 형성되어 있다.중심 마을인 본촌은 조선시대 밀양부의 동 창(東倉)이있었던곳이다.임진왜란이후상주주씨와밀성박씨가 입촌하여마을을형성하였다. 절사공의선조는밀양지역의토호(土豪)이다. 대제학공(휘 윤문.12대조)께서 밀주의 풍각화산(밀양부,현 청 도군풍각면화산)본가에서출생하였고,밀양하남읍수산리소재 경모재이건기를보면대제학공께서공민왕신축(辛丑)년에군부 인김씨(郡夫人金氏)와 더불어 밀성(密成, 현 밀양)에서 병란(兵 亂,홍건적의난)을피하던중별세함에귀명골에장례(葬禮)을치 르고재실(齋室)을짓고추모(追慕)하였다라고전해지고있어밀 양부(현밀양시)토호세족이다. 그러나 대제학공의 아들 판서공을 비롯 수대에 이르러서는 조 정에 출사하였기에 한 양 부근의 경기 양평,여주에서 생활하다 절 사공의증조부진사공(휘숭겸)에이르러밀양부북면,조부휘문 전(文銓)은밀양 교동을거쳐아버지(휘희기)밀양동문밖(현밀 양시 용평동)에서 거주하다 임진왜란에 화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 다. 임진왜란 당시 다죽리 뒤쪽의 높은 산 앵봉(鶯峯) 사이에서 임란을 피해 은거하였고, 왜적에게 발견되어 피살되었던 것이 다. 그리고 절사공께서 일본에 억류되었다 해방되면서 단장면 국전리노곡마을에세거지를정하고무예를익히고무과에급제 하였다. 이후절사공의손자통덕랑시진(時璡)시완(時完)형제가죽원 리에 거주하던 절사공의 두 번째 부인인 숙부인 월성김씨의 도움 으로금곡리금계마을에세거하게되면서오랜집성촌이되었다. 이에후손들은‘절사공파종친회(회장수화)를구성하여절사공 의명성에누가 되지않도록 최선을다하면서절사공의부조묘 향 사를 받들며 원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선조의 음덕을 기 린다. 뱚▶6면에서계속 집성촌 경남밀양시산외면금곡리본촌마을 금곡리본촌마을전경,마을한가운데금계사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