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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11월30일 토요일 7 (제215호) 기 획 고려 때 귀주성을 굳게 지켜 몽고군을 격퇴한 철 혈용장(鐵血勇壯) 박서 장군을 추모하는 가을 시 향이 지난 달 31일 관향지 인충북음성군음성읍삼 생리 선영에서 대종회(회 장 용범)주관으로 박서 장군과 아들 재(梓, 공부 상서),손자현계(玄桂,평 해부사)공(公)순으로차례로봉행하였다. 먼저 관조인 박서 장군 시향에는 문익공종의 원로고문인평현,정승공파종중희진회장,충민 공종중의용혁현종순의각각헌작하고은기축 관이독축하고좌우집사에용업,용선현종이각 각 소임을 맡아 원만하고 차분하게 제례를 도왔 다. 이어 들 재(梓, 공부상서), 손자 현계(玄桂, 평 해부사) 공(公)의 제향에도 달근 현종에 집례를 맡았으며상배정승공파전회장과청활,용관현 종이초헌,아헌종헌관으로헌작하였고,은기축 관이계속하여독축했다. 이날제향은지난3월총회에서추대된용범회 장이 주관하는 첫 제례로서 인사말을 통해서는 시제를 통해서 삼개지파(문익·정승·충민공) 후 손들이 일 년에 한번 모이는 자리로서 정을 나누 고 화합하여 더 발전하는 대종회로 이끌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묘역이 청결하게 잘 관리 되고 있 어음성의종친여러분에게진심으로감사드린다 고 말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제례를 봉행토록 당부했다. 박용범 회장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평생을 후 학양성에 매진한 교육자로 성남시 분당 야탑중 학교교장으로정년퇴임했다. 홍조근정훈장을 수상하였으며, 퇴임 후에도 각종봉사단체에서활동하였다. 특히 문익공 종중의 종사에 적극 참여하여 후 진들에게보학과전통문화보급에앞장서왔다. 음성박씨는 주성 전투의 영웅 박서장군을 관 향조로 하고, 고려 충숙왕 때 전리총랑(典理摠 郞), 평해부사(平海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327 년(충숙왕14) 정승(政丞) 윤석(尹碩)과 함께 조 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 된 손 자 현계(玄桂)의 아들 문서(文瑞), 문길(文吉), 문환(文桓)등 3형제에이르러장남 문서의차자 (次子) 원(洹)은 조선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여 정승공파(政丞公派)로 광주 전남지역 에,차남문길이장남순(淳)은조선초마지막함 흥차사의주인공으로판중추부사에증직되고시 호는 충민(忠愍)으로 충민공파(忠愍公派)로 음 성과 의왕시 등,순(淳)의 아우 정(淨)은 조선 태 종때세자빈객,예문관직제학,예조판서를거쳐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문익공파(文翼公派)경기 화성시등에 집성촌을 이루며각각분파되었다. 박서장군은 1231년(고종18년) 몽고의 침입에 서 천하무적 몽고 기병의 영예를 여지없이 깨뜨 린 전투가 있었으니,바로 박서장군이 지킨 귀주 성전투였다. 그러나 왕명을 어길 수 없는 신하의 도리를 지 켜 순응하고 성을 열어 항복하고는 분연히 벼슬 을버리고음성으로낙향하였다. 이후 귀주성을 굳게 지켜 몽고 군을 격퇴한 철혈용장(鐵血勇 壯)박서 장군은 문하시랑평장사 에 제수되고 충정공(忠靖公)의 시호와 함께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졌으며, 충절(忠節)과 무공 을 기리고자 조선 숙종30년(170 4) 예조판서 민진후(閔鎭厚)의 주청(奏請)으로 평안북도 귀주 에 정공사가 세워졌고 이듬해 사 액(賜額)되었다. 한편 이날 제향후에는 문하시 랑공(휘 문길)의 시향이 문익공 과 충민공 후손 주관으로 봉행되 었다. 음성박씨관조(貫祖)박서장군시향봉행 음성박씨관조박서장군의시향이지난달31일음성의선영에서봉행된가운데참례한종원들이함께하고있다. 제관,왼쪽부터은기축관,평현초헌관,희진아헌관,용혁종헌관,달근집 례. 뱚박용범회장취임후첫제례주관븣제를통해서삼개지파 뱚(문익·정승·충민공)후손정(情)나누며대종회발전을이끌어주길당부 박용범회장 음성박씨 정승공파종친회(회장 희진)는 지난15일(음10.15)오전 입 향조(휘 계양) 이하 선조의 유택이 있는광주서구풍암동묘원에서시 향을 봉행하고 이어 임진왜란에 크 게 공헌하고 극진한 애민정신과 광 주향약을 제정하는 등 지역의 유현 (儒賢)으로 숭봉(崇奉)해온 회재 선생의 제향이 벽진서원 의열사에 서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질서정연 하게봉행되었다. 박성련 고문의 집례로 진행된 벽 진서원 제향은 희진 종친회장이 초 헌관으로헌작하고이어경국,숭근 일가님의아헌과종헌,그리고정채 일가님이축관을맡았다. 정승공파는 관조 박서장군의 증 손자 문서(文瑞)의 차자(次子) 원 (洹, 묘소 정읍)을 파조로 한다. 그 는 조선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였으며,은퇴하여호남땅초 산(현 정읍시) 영의정동 물러났으 니그동명이공으로인해불리기시 작했다.도학과문장이뛰어나 포은 정몽주,야은길재선생등과도의로 서 사귀었고,사문(斯文)을 크게 일 으키는것을사명으로일관하였다. 공의 아들 성균생원 계양(繼陽) 은 광주 유곡에 새 터전을 점지하 고, 사마시에 합격하고도 더 이상 현달(顯達)을구하지않았다. 성균생원(휘 계양)의 아들 형지 (亨之)는 선대의 덕업(德業)을 계 승하여 현달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자질(子姪)들에게충효(忠孝)의도 (道)로서지도하였으며음사(蔭仕) 로 선무랑 예빈시주부에 제수되었 고, 장남 자회(子回)는 경술(經術) 과 효우(孝友)로 장사랑(將仕郞) 전연사(典涓司)참봉(參奉)에특천 되었고, 차남 자유(子游)는 학행으 로 장사랑천문습독(將仕郞天文習 讀)에 제수되었으며, 삼남 자고(子 皐)는 천리(踐履)가 위실(爲實)하 였기에 대신(大臣)의 천(薦)으로 선무랑천문습독(宣務郞天文習讀) 에 특제(特除)되었다. 이후 후손들 은 소과와 대과에 급제자를 배출하 면서 지역의 명문가로 거듭 태어났 고, 이들 삼형제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여 호남지방 토호세족으로 불린다. 벽진서원은 1602년 회재 박광옥 선생의 학덕과 절의정신을 추모한 후학들이 광주 서구 벽진동에 창건 하여 향사(享祀)와 교학(敎學)에 힘써왔으나 1868년에 대원군의 서 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27년에 운리영당(雲裏影堂)을 설립해 향 사하였는데 도시개발로 선생의 묘 소와 영당이 편입되어,1999년에 묘 소를 이장하고 그 옆인 서구 풍암동 769-1번지에 운리사(雲裏祠)를 종 중에서건립했다.이후뜻있는 유림 과학자들이150년만인지난2018년 6월7일지역유림들에의해복설되 었다. 이후 유교문화 활성화를 위해 유 학 사상과 한시 해설을 비롯 하여 사서오경 등 유교아카 데미 강좌 운영으로 서원 본 래의 목적에 충실함으로서 성균관으로부터우수서원으 로 평가받고 있으며, 다문화 학생들을 위한 한국의 전통 문화 체험, 청소년 인성예절 교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 램 운영으로 관내 여러 학교에서도 인성교육 현장 체험 장소로 선호하 고 있다. 그리고지난 8월성균관으로부터 븮성균관청소년인성교육원 광주지 원븯설치에관한업무협약을체결하 고 지난 10월 8일 현판식을 갖고 인 성교육의메카로거듭나고있다. 음성박씨광주입향조이하선조묘원·벽진서 원추향봉행 벽진서원인성교육의메카로거듭나고있어 광주도심속서원인벽진서원추향이종중주관으로봉행된가운데참례한종원과제관이함 께하고있다.서원춘향은호남지역유림주관으로봉행된다. 박희진회장이초헌관으로헌작하고있다. 충민공(휘 순)과 문익공(휘 정) 양형제를두어종중을크게번성하 게 하였던 비조(鼻祖) 문하시랑공 시향이지난달31일음성의묘역에 서 달근 고문의 집례로 재활, 용업, 용일현종이각각제관으로각각헌 작하며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봉행 되었다. 문하시랑공(휘 문길)은 고려 충 숙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郞), 평해 부사(平海府使)등을역임하였고,1 327년(충숙왕14) 정승(政丞) 윤석 (尹碩)과 함께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록된 휘 현계 (玄桂)의 아들이다.고려 말 벼슬에 나아가 사재부령(司宰副令)을 지 내고 지군사(知郡事)를 거쳐 문하 시랑(門下侍郞)에 올랐다. 아들 둘 을 두어 충민공파와 문익공파로 분 파되어 충북 음성과 경기도 화성지 역에큰집성촌을이룬다. 충민공은 조선 초 함흥차사로 더 유명한박순선생이다.우왕14년(13 88)요동정벌때우군통도사이성계 군대의 도평의지인(都評議知印)으 로종군하여위화도회군의글을우 왕에게전했다. 성품이 곧고 의리가 깊었으며 이 성계와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후 에 이성계가 조선(朝鮮)을 세워 태 조임금이되자개국공신이되어상 장군(上將軍)에 올라 삼군부를 관 장하였다. 그리고 훗날 태종(이방원)의 명 을 받아 태조(이성계)를 도성으로 모셔오는 임무를 안고 함흥에 갔으 나끝내모셔오지못하고태조의신 하 조사의(趙思義)에게 붙잡혀 허 리를잘려그만그용흥강가에서운 명을달리했다. 태종(太宗)이선생의죽음을듣고 “박순이반드시죽을줄알고도가기 를 청함은 옛날에도 없었던 충용(忠 勇)이있음이라”하고명하여판승추 부사(判承樞府事)에증직하고,노비 (奴婢)와전토(田土)를하사하고화 공(畵工)에게명하여선생의반신을 그려길이보전케하였다. 문하시랑공의 차자 문익공 휘 정 (淨)은 세종 을묘(1435년)에 좌찬 성과 조봉대부에 증직되고, 시호 (諡號)는 문익(文翼)으로 전답 수 백묘(畝,이랑)를하사받아그자손 에게 전하게 하고 불천위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행직으로는 함흥 안민순시관, 예문관직제학과 세자 좌빈객,예조판서에이르렀다. 어릴 적부터 총명이 보통 사람보 다뛰어났고,품성이온화하고양순 (良順)하여 부모를 효(孝)로서 받 들고, 임금을 섬김에 충성(忠誠)을 다하고, 백성 살핌을 관용(寬容)으 로 하며,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 공 손(恭遜)으로 하며 친구와 더불어 사귐을 신의(信義)로 하였다. 특히 학문(學問)은 못처럼 깊었으며, 덕 행(德行)은산처럼높았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만년(晩年) 에 향제(鄕第, 고향집)에 돌아와서 전(全) 고을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학생들이 많아 학사(學舍)가 비좁 아도 향학(向學)에 열정은 끝이 없 어 향당(鄕黨)에 아름다운 풍속(風 俗)이 사무쳤다. 이로 보아 문익공 의 학덕(學德)을 가히 짐작해 볼만 하다. 음성박씨문하시랑공(휘문길)시향 충민공·문익공양형제후손크게번성 문하시랑공제향이관조제향후묘원맨아래에있는묘소에서봉행후후손들이기념촬영을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