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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10월31일 월요일 7 (제190호) 기 획 부제학공 휘는 강생(剛生)으로 자(字)는 유지(柔之)이고 호는 나산경수(蘿山耕 쑴)이다. 1369년(고려 공민왕 18·기유) 에 전서공(典書公)과 밀산박씨(密山朴氏) 사이에서 둘째 아 드님으로 태어났다. 공은 1390년(공양왕 2) 6월 경오식년시 (庚午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에 올라 1408년 (조선조 태종 8)에 진위사(陳慰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를 다녀왔고 1412년(태종 12)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1414년(태종 14) 수원도호부사 (水原都護府使), 1422년(세종 4·임인) 6월 22일 함경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있을 때 졸(卒)하시니 향년 54세였다.공은 한 때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배불론(排佛論)을 저술한 바 있으며 자손들에게 전하는 장문(長文)의 유서(遺書)가 전해 져 온다. 훗날 1424년(세종6)에 공의 따님 장의궁주(莊懿宮 主)가 세종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귀인(貴人)이 되자 의정 부좌찬성에증직되고밀산군(密山君)에책봉(冊封)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파평(坡平)윤씨로 승경(承慶)의 따님으 로슬하에삼형제를두었는데장자의문(疑問)은호군공파파 조, 차남은 절문(切問), 셋째 심문(審問) 청재공파 파조이다. 차남 휘 절문(切問)은 1390년 (공양왕 2·경오)에 부제학공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411년(태종 11·신묘) 4월 6일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權知校書)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석 달 뒤인 그해 7월 2일에 하세(下世)하였으니 22세의 젊은 나이였다. 배위는 정경부인 고려 왕씨(王氏)로 고려조 현종 (顯宗)의 13대손 영복군(永福君) 격( 교)의 따님이다. 슬하에 대손(大孫,절도사공파 파조),중손(仲孫,공효공),형제를 두 었다. 차남 휘 중손(仲孫)의 자(字)는 경윤(慶胤)이며 호(號)는 묵재(默齋)또는 백당(栢堂)이라 하였다 공께서는 1412년(태 종 12·임진) 정월(正月)에 정자공(正字公)의 유복자(遺腹 子)로 태어나니 모부인(母夫人)은 정경부인 고려왕씨(王氏) 로영복군(永福君)격( 교)의따님이다. 할아버지 부제학공의 가르침을 받고 성장하여 1426년(세종 8·병오)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5년(세종 17·을묘) 4월 7일 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제수 되어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서운 판관(書雲判官 관상감의 종5품 벼슬 이름)으로 발탁되어 장 영실(蔣英實)을 독려하여 경복궁 뜰에 혼천의(渾天儀)를 간 직한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를발명제작하게하였다세종대왕의특명이기도하였다. 공께서는 의정부 검상(檢詳)을 역임하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때인 1449년(세종 31·기사) 8월 3일에는 동료 선 비 구치관(具致寬)이 의정부 검상 벼슬에 있다가 김종서(金 宗瑞)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지방(關西地方)으로 떠 나매 송별의 시(詩)를 지어주기도 하였는데 이때 지어 읊은 시(詩) 븮관서(關西)에 종사관으로 가는 구검상(具檢詳)을 보 내며븯라는 시는 훗날에 동문선(東文選)에 오른 당대의 명시 (名詩)이기도하였다. 공께서는 문종(文宗) 때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정원 (承政院)에 들어가 부승지와 좌우승지를 두루 거치고 1453년 (단종 1·계유) 7월 21일에는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1453 년(단종 1·계유) 9월 25일의 일이다.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 남,구치관,홍윤성 등을 앞세워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 서 등을 때려죽이고 정권을 장악하는 정란을 일으켰던 계유 정난(癸酉靖難)의 와중에서도 공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제수되었다. 1454년(단종 2) 2월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이해 6월에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에 올 랐다. 1455년(단종 3·을해) 1월 24일에 공께서는 수충위사협 찬 정난공신 가정대부 사헌부 대사헌 응천군(凝川君)으로 봉 하는 교서와 함께 그 부모와 아내에게 벼슬을 주고 사유(赦 宥)가 영구히 후대에 미치게 할 것이며, 인하여 전지 200결 (結), 노비 25명, 안구마 1필, 백은 50냥 그리고 표리 1단을 하 사받았다. 이 시절의 전지(田地) 200결(結)은 오늘날의 백여 만 평(坪)이웃도는넓은 땅이었다.지금의원당 선영지(先塋 地)가이때하사받은땅으로추정된다. 1455년(단종 3) 2월 26일에 공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 수되어 판서 대열에 올라 승진하였다고는 하나 실상은 수양 대군과 양녕대군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하였다 하여 대사헌 자리에서내친것이니수양대군이왕(王)이되는것을반대하 고 안 따랐기 때문이었다.공의 심중이 그러하였기에 넉 달 뒤 인 6월 26일에는 아예 사직을 하여 공조판서 벼슬까지 내쳐 버리고 은거하시게 된다. 이 시절 공께서 은거하시던 곳이 잣 나무가 우거진 백동(栢洞)마을로 지금의 종로구 혜화동 사거 리 동숭동으로 동성고등학교 남쪽 편 낙산가든(駱山食堂) 집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이러하여 공의 아호를 스스로 백당(栢 堂)이라 한듯하다 1455년(세조 즉위년) 윤유월 20일에 단종 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되고 그 뒤를 이어 수양대군이 왕 위에오르니세조(世祖)다. 세조는즉위식을끝내자마자자기를싫다 하고벼슬에서물 러나 은거하고 있는 묵재공(默齋公) 박중손(朴仲孫)을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하고 그 참판(參判)에는 권남이라는 실세 중에서도 실세를 임명하였다. 공께서는 공조판서직에서 물러나 칩거한 지 40여 일 만에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 半)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이 시절의 권남은 양촌 (陽村) 권근(權近)의 손자로 공의 사형(舍兄) 대손(大孫)의 처남(妻男)이니세상에한분밖에없는친형수의남동생이었 다. 공께서는 1456년(세조 2) 2월 4일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오르고형조(刑曹),예조(禮曹)판서를 역임한 후1 457년 3월에는 밀산군(密山君)으로 개봉되고 우참찬(右參 贊)에올랐다가 좌참찬(左參贊)으로승차하였다. 공께서는 1459년(세조 5·기묘) 9월 21일에 모부인(母夫人) 왕씨(王氏)께서 하세하시니 풍수가(風水家)의 말에 따라 원 당 선영하 정자공(正字公) 묘소 위에 예장하여 모시었다. 공 께서는 모부인의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어 고 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得失)을 논하여 아들들에게 경계토록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자신 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한다. 공께서는 1466년(세조 12·병술) 5월 26일에 하세(下世)하시니 향년(享年) 55세이셨다. 공의 부음(訃音)을접한세조는경순사상왈 공(敬順事上曰恭)이 요 자혜애친 왈 효(慈惠愛親 曰 孝)라는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지전(不 튐之典)을 내려 제사토록 했다. 배위 남평(南平) 문씨(文氏)는 공조정랑(工曹正郞)문승조(文承祚)의 따님이 니 맑고 아름다우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슬하에 남(楠, 부평 공파 파조), 미(楣, 존성재), 건(楗, 공간공파 파조) 삼형제를 두었다. 존성재공 휘 미(楣)의 자는 자첨(子詹)이고 호는 존성재 (存誠齋)라 하였다. 공은 1433년(세종 15·계축) 9월 24일에 공효공(恭孝公)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1453년(단종 원년·계유)사마시에 뽑히었고 1458년(세조 4)별시(別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1460년(세조 6)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1 463년(세 조9) 이천부사(利川府使), 1488년(성종 19) 사섬시 전사관(司瞻寺典祀官),1489년(성종 20)승정원 동부승지(承 政院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예조참의(禮曹 參議)를역임하였다. 공께서는 1491년(성종 22·신해)5월 6일에 하세하니 향년 5 9세였다.정부인진산강씨와의사이에6형제를두었는데장자 의영(義榮)은대간공파파조이고,차자광영(光榮)의자는군 실(君實)이다. 1463년(세조 9·계미) 2월 18일에 태어나 1486 년(성종 17)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승문원부정자와 홍문관 박사를 거쳐 봉상시 주부에 전직되었다가 1503년(연 산 9)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고 1504년(연산 10· 갑 자 )에 사 간 원 (司 諫 院 ) 정 언 (正 言 )으 로 있 을 때 연 산 (燕 山 ) 생모 윤씨의 추숭을 반대하여 목천(木川)에 유배되었다가 전 라도영광으로이배(移配)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으로 귀양에서 풀려 사간원정 언(司諫院正言)에 복직되어 1507년(중종 2) 지평(持平), 교 리(校理), 집의(執義), 의정부 검상, 사인을 거쳐 1514년 통례 원 좌통례로 평안도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이 되어 다녀왔 다.1516년 승정원 동부승지,사간원 대사간,병조참의를 지냈 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 돈령부 도정으로자리를옮겼다. 1522년황해도관찰사로있을때간신의모함으로강릉부사 (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1526년 이조참의,승정원좌부승지 를 거쳐 1528년(중종 23·무자)에 한성부우윤이 되고 밀성군 (密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29년 동지중추 하정사(賀正 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나갔다.1532년 호조참판을지내고형조참판에이르 렀다. 1537년(중종 32·정유) 봄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 되었으나 너무 고령(高齡)이라 하여 체직되었다. 같은 해 가 을 1537(중종 32·정유)8월 28일에 하세하시니 향년 75세이셨 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아들 조(藻)·난(蘭)· 이(苡)·아(莪)·회( 狙)·훤(萱)·온(蘊) 등 7칠제를 두었는데 넷째부터일곱째까지는전해지지않는다. 장자 조(藻)의 자(字)는 사결(士潔) 음보(蔭補)로 별제이 고증이조판서응천군(凝川君)에봉해지고아들형제를두었 는데 장자 충원(忠元)의 자는 중초(仲初)이고 호는 낙촌(駱 村) 또는 정관재(靜觀齋)라 했다. 1507년(중종 2·정묘) 윤 정 월16일에 태어나 기준(奇遵)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한 뒤중 종(中宗) 23년(1528) 생원(生員), 중종 26년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거쳐 중 종 31년(1536) 교리(校理)로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 官)이 되었다 중종 34년 임백령(林百齡)의 탄핵(彈劾)으로 한때 파직되었다가 중종 36년(1541·辛丑) 9월 7일 영월군수 (寧越郡守)로 등용되부임하였다. 이 무렵 영월군 관사(官舍·군수가 사는 관사)에는 요괴(妖 怪)들의 출몰로 부임하는 군수마다 비명(非命)으로 죽는 변 고(變故)가 잦아 누구도 수령(守令)으로 가기를 꺼려 3년여 에 이르러 거의 폐읍(廢邑)직전이었다.그러나 선생은「내 이 름이 충원(忠元)이요 죽음은 명(命)이니라」 하면서 이를 자 원했다. 부임 초야(初夜)에 꿈속에서 단종왕(端宗王)이 현신 (顯身)하여 화답한 후,곧 단종의 묘를 찾아내어 천장봉축(遷 葬封築)하고 손수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모시니 이후로 는 요괴들도 사라지고 무사했다고 한다.공께서는 4년여의 군 수소임을무사히마치고명종(明宗)이즉위하던1545년11월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으로 원접사(遠接使) 정사룡(鄭士 龍)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두 번째 원접사행(遠接使行)했 다. 공은 1546년 10월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제수되었으나 때마침 중시(重試)가 있어 합격하니 이를 체직하고 교서관 (校書官)판교(判敎)에 제수되었다가 1548년(명종 3)에는 좌 통례(左通禮)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상우도(慶尙 右道)에암행하여기민(饑民)을구휼(救恤)하였다. 1552년(명종 7·임자)에 공은 당료(堂僚·湖堂)들인 정유길 (鄭惟吉), 윤현(尹鉉), 김귀영(金貴榮) 등과 더불어 사재(私 財)를 털어 독서당(讀書堂) 남쪽에 당(堂)을 새로 지어 루명 (樓名)을 문회루(文會樓)라 하였다. 1566년(명종·병인) 4월 11일 공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로 홍문관대제학(弘文館 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랐다. 이날의 인 사발령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지중추부사로, 공의 아 드님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 공은 경기관찰사로 임명되 었다. 이 시절 낙촌공께서는 세 번씩이나 사직의 글을 올렸으 나이때의명종은이를윤허하지아니하고특지(特旨)라며대 제학병조판서박충원(大提學兵曹判書朴忠元)이란 열자를 어 필(御筆)로내려주었다. 공께서는 58세 되던 1564년(명종 19·갑자)에 명종의 특지 (特旨)로 자헌대부(資憲大夫)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른 이 후 16년 동안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두루 역임하였고 이조판 서만도 네 번이나 역임하였다.환갑 되시던 1567년(명종 22·정 묘) 5월에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중국 사신 허국(許國)을 원접사행하였으며나중에는우찬성(右贊成)에이르렀다. 1581년(선조 14·신사) 2월 16일에 공께서 졸서(卒逝)하시 니향년75세이셨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저서로는 븮낙촌박선생유고븯(駱村 朴先生遺稿)븡븮영해창수록븯(嶺海唱酬錄)을 남겼다. 슬하에 계 현(啓賢), 응현(應賢), 용현(用賢), 호현(好賢) 4형제를 두었 는데 장자 계현(啓賢)의 字는 군옥(君沃)이며 호는 관원(灌 園) 또는 근사재(近思齋)라 했다 공은 1524년(중종 19·갑신) 11월 6일에 한성부(漢城府) 동부숭신방(東部崇信坊) 타락산 (駝駱山)아래 쌍계동(雙溪洞·오늘날의 이화동)마을에서 태 어났다. 1543년(중종 38·癸卯)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고 1552년(명종 7·임자) 4월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 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권지 정자(權知正字), 예문관 검열(檢 閱), 수찬(修撰)에 올라 1555년(명종 10·을묘)에 독서당(讀 書堂)에 들어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1556년(명종 11) 에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59 년(명종 14)이조정랑,홍문관 부교리,의정부 검상(檢詳),사 인(舍人),사헌부장령(掌令)을거쳐장단부사로나가치적이 두드러졌다. 1560년(명종 15) 윤원형(尹元衡)의 청혼(請婚)을 거절하 여 만포진(滿浦鎭)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로 나갔다가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로 들어와 1562년(명종 17)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563년(명종 18) 병조참의(兵 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1565년(명종 20·을축)에 승정 원 도승지(都承旨),한성좌윤(漢城左尹),사헌부대사헌(司憲 府大司憲)으로 올라 동인(東人) 서인(西人)의 당쟁(黨爭)을 억제하고자 힘썼으나 실패하였다. 1566년(명종 21·병인) 3월 에 병조참판 벼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부경사행(赴京使 行)하였고 이해 10월 8일에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가 1567년 (선조 즉위년·정묘) 9월에는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회재(晦 齋)이언적(李彦迪)의 신원(伸寃)을 상소(上疏)하여 뜻을 이 뤘으니 오늘날의 경주(慶州) 옥산서원(玉山書院)이다. 공께 서는 이 시절을 즈음하여 손수 서문(序文)의 글을 지어서 책 을 출판 간행하였으니 양심당시집(養心堂詩集)이다. 이 시절 에 지어 남긴 유시(遺詩) 자계(紫溪) 16영(十六詠)은 당대의 명시(名詩)로유명하다. 1571년(선조4) 호조판서(戶曹判書)와 동지의금부오위부 총관을 거쳐 1572년(선조 5) 진위정사 서장관(陳慰正使書狀 官)이되어세번째중국을다녀왔다. 1573년(선조 6·계유) 3월에 함경감사(咸鏡監司)로 나갔다 가 탄핵을 받고 체직 되었다가 1575년(선조 8·을해) 3월에 전 라도관찰사 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운봉(雲峯· 남원시 지명)의 태조대왕 오랑캐 정벌 자취를 살펴 장계를 올 려 비(碑)를 세워 후세에 보여줄 것을 청하였다.이 시절 나주 (羅州) 군영지(軍營地)에서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찾아든 백호(白湖) 임제(林悌)를 만나 서로 주고받은 시문 (詩文)은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말해주는 명시(名詩)로, 제목은멀리일본(日本)학계에까지연구서적이되어출판된 바있는이른바관백창수록(灌白唱酬錄)이다. 공은 1575년(선조 8·을해) 7월 말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 고귀경하여예조및이조참판을지내고다시도승지(都承旨) 가 되었다가 1576년(선조 9·병자) 공조판서(工曹判書), 1577 년(선조 10·정축) 4월에 예조판서(禮曹判書), 1579년 6월 형 조판서(刑曹判書), 1580년(선조 13·경진) 병조판서(兵曹判 書)에이르렀다가 득병(得病)하여자리에 누우니 지중추부사 (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다가 이해 4월 초일에 아버지 낙촌 공보다앞서하세하시니향년57세였다. 문장(文莊) 븮근학호문왈 문 勤學好文曰 文) 이정지화왈 장 履正志和曰 莊)븯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당시 동인 서인의 당쟁이 심해지자 이를 걱정해 제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편서로는 밀산세고가 있다. 슬하에 안세(安世), 안민 (安民), 안명(安命), 안도(安道), 안국(安國) 오형제를 두었 다. 장자 안세(安世)의 자는 기지(器之), 1542년(중종 37·임 인)6월16일에태어나니공은일찍이 윤원형(尹元衡)의 첩실 정난정(鄭蘭貞)이 사위로 삼고자 청혼(請婚)하였으나 당시 병참(兵參) 대감이던 낙촌(駱村) 조부(祖父)께서 이를 한마 디 로 일 축 하 자 정 승 ( 政 丞 )을 시 켜 준 다 며 두 번 세 번 씩 이 나 청혼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자 공의 부친 관원공을 장단부사 (長湍府使) 자리에서 국경 멀리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 制使)로 내쫓는 등 횡포를 부려 공께서는 과거시험(科擧試 驗)은 아예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문정왕후가 죽고 그들마저 죽으매 시절이 바뀌어 1616년(광해조 8) 돈령부(敦寧府) 도 정(都正)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령부사(知敦寧府 事)를 역임하고 응원군(凝原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공은 1 618년(광해조 10·무오)4월 22일에 하세하니 향년 77세였다. 이때 공의 장자 승종(承宗)은 좌찬성(左贊成)으로 숙민공 파 파조 둘째 승조(承祖)는 연안도호부사(延安都護府使)로 연안공파 파조, 막내 승황(承黃)은 김제군수(金堤郡守)를 지 내김제공파파조이다. 관원공의 차자 안민(安民)은 부정공파 파조, 셋째 안명(安 命)은 월봉공파 파조, 넷째 안도(安道)는 숙부 용현(用賢, 참 군공)의 후사를 이었고, 다섯째 안국(安國)은 영해공파 파조 이다. 낙촌공의 둘째 응현(應賢)은 별좌공파 파조, 셋째 용현(用 賢)은참군공파파조,넷째호현(好賢)은화록공파파조이다. 응천공(휘조)의차남효원(孝元)은경력공파파조이다. 밀성군(휘 광영)의 셋째 휘 란(蘭)의 자는 양숙(養叔)이고 호는 오정(梧亭)이다. 공은 1495년(연산군 1·을묘) 6월 밀성 군의 아들로 태어나니 응천군 조(藻)의 아우로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거쳐 고원군수(高原郡守)북평사(北評事)를 역임(歷任)하고 아들 숭원(崇元)의 귀(貴)로 밀평부원군(密平府院君)에 봉 (封)해지고 순충적덕 보조공신(純忠積德輔祚功臣)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다. 1554년(명종 9·갑인) 가을에 하세하였다. 아들 인원(仁元), 숭원(崇元), 형원(亨 元)을 두었는데 장자 인원(仁元)은 전한공파 파조,차남 숭원 (崇元)은충정공파 파조,셋째 형원(亨元)의 자는 태초(太初) 의금부도사를 지내 도사공(都事公)으로 칭하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슬하에 제현(齊賢)·우현(友賢)형제를 두었는데 장자제현(齊賢)은여산공파파조,차남우현(友賢)은지평공 파파조이다. 밀성군(휘 광영)의 넷째 휘 이(苡)의 자는 이지(苡之)정덕 병자년(중종11븡1516)에 사마시에 올라 내자시부정(內資寺副 正)으로 부정공이라 하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호원 (好元),순원(舜元),종원(從元)을 두었는데 장자 호원(好元) 은 송월당공파 파조, 차자 순원(舜元)은 승지공파 파조, 셋째 종원從元)은죽당공파파조이다. 존성재공의 삼남 증영(增榮)의 자는 희인(希仁)이며 호는 눌재(訥齋)이다. 1464년(세조 10·갑신)에 존성재공의 셋째 아들로태어나니공효공의손자다.외조는강석덕이며처부는 죽산인(竹山人) 현감(縣監) 박영달(朴英達)이다. 1480년(성 종 11) 식년진사시(進士試)에 2등 하였고 1483년(성종 14) 3 월 춘장시(春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 하였다. 1486년(성종 17)10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원접사(遠 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을 때 중국사신 동월( 뜁越)이 공의재능을기이하게여겨써준자사시(字辭詩)에이르기를 “문장(文章)은 소노천(蘇老泉)과 두보(杜甫)의 글과 같고 글 씨는 송설(松雪) 조맹부를 닮았다.” 하고 “희인(希仁)”이란 자(字)를 지어주었다. 성종이 매우 아끼고 경중 하여 용연(龍 硯· 용의 모양을 새기어 만든 벼루)을 내렸다. 1490년 사가독 서(賜暇讀書)를하고경연시독관(侍讀官)이되었다. 홍문관 박사와 사간원 헌납을 거쳐 1492년(성종 23·임자)1 1월 28일 교리(校理) 벼슬에 이르렀을 때 졸(卒)하니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공의 전서(篆書)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그해 12월26일(임술)에양주군마적산 언덕에 모시었다가 2005년 가을에 청주 옥산면 호계리 대산 (大山) 내자좌(內子坐)의 부인 죽산박씨(竹山朴氏) 곁으로 이장 합폄으로 모시었다. 아들 훈(강수공, 문도공파)과 혜(주 부공파)을두었다. 존성재공의 넷째휘 소영(召榮)은 해백공파 파조이고,다섯 째안영(安榮)은 사마시에오르고좌승지에증직되었다.아들 빈( 섹)의 생부는 밀성군 광영(光榮)이다.사마시에 올라 사도 시정을 역임하였고, 전주, 강화 양읍의 현감을 지내고 이조참 판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성원(誠元) 은 진사공파 파조,차남 경원(敬元)은 별제공파 파조,셋째 근 원(謹元)은낙봉공파파조,넷째신원(愼元)은진사시에오르 고 예빈시 부정으로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그의 장자 안현 (安賢)은 선곡공파 파조이고 11대손 용화(鏞和)는 충정공이 다. 규정공의 후예는 문과 급제자 69명,봉군 16명,시호를 받은 분이 13명으로 가히 명문가이다. 고려 공양왕조 1390년 경오 식년시에 부제학공(휘 강생·剛生)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문과 급제자는 당대의 명제상으로 이어졌고, 고려 상장군으로 추 성익위공신에 오른 휘 사경(思敬)을 비롯 단종절신 청재공 (휘 심문) 등 17명의 충신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1602년 경신 보를 시초로 수보하여 가문의 체계를 세웠으며 특히 35지파 로 운영되는 대종회(회장 성훈)는 매년 지파종중의 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함으로서 육영에 힘써 명문가의 길을 걷고 있 어훗날에도영화가이어질것으로믿어의심치않는다. /다음호에계속(35파파조행장소개) ▶6면에서이어짐 봉서재전경 전서공의배위밀산박씨와함종곽씨묘소,전북완주군봉서산(조선8대명 당에속한다.) 맺은말